Bible

 

창세기 4:25

Studie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Komentář

 

교의

Napsal(a) Joe David (strojově přeloženo do 한국어)

In this photo, entitled Reaching Out, two bean plants are climbing adjacent poles, and they have each reached out a tendril to bridge the gap.

교리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행동하고 생각하는 방식을 알려주는 조직화된 진리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리'는 거창하거나 엄숙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잔디 관리, 자동차 정비, 고추 고치는 법과 같은 사소한 일들에 대한 교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종류의 교리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이러한 교리의 이면에는 종종 부모님이 그렇게 했거나, 어디선가 읽었거나, 또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자선적인 교리나 "내가 먼저"라는 이기적인 교리와 같이 일반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교리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자신의 교리, 즉 사고방식에 따라 살아갑니다.

스웨덴보그는 '교리'를 현실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영적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을 의미하기 위해 아주 구체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성서나 코란과 같이 기록된 신성한 믿음이 있고, 일부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옵니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교리를 정립합니다. 많은 경우 같은 종교의 조직은 서로 다른 진리를 강조하거나 거부하고 다른 형태의 교리를 발전시킵니다. 또한 종교마다 원래 믿음의 타당성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문자 T를 포함한 진리가 신의 어떤 버전에서 비롯되었다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새 교회를 위한 글에 따르면 성경에서 도시는 교리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도시는 조직화된 거주지이자 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며, 사람들 간에 사상과 재화가 많이 교류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다양한 이웃을 수용할 수 있고 요새화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는 이 모든 것을 교리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정복하거나 거주하거나 건설해야 할 도시가 얼마나 자주 언급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도시에 대한 언급은 일찍이 창세기 4:17,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직후 가인이 놋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아들 에녹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11, 인간은 잘 알려진 바벨탑뿐만 아니라 그 탑의 일부였던 도시도 건설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수백 개의 도시가 언급되어 있으며, 이 도시들은 서로 다른 교리 구조를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의 다음 장과 마지막 장(요한계시록 20) 우리는 새 예루살렘 성의 하느님께서 지상에 내려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 교회에 속한 우리는 이 도시가 1700년대에 에마누엘 스웨덴보그가 기록하여 출판한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교리로, 기독교에 들어온 잘못된 생각인 하나님 안에 세 인격이 있다는 생각과 나중에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해결해 주는 교리라고 믿습니다.

새로운 기독교 교리는 하나님은 한 분, 즉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신 한 분의 신성한 인격이 계시며, 구원을 얻으려면 믿음과 자선(참된 사상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Odkazy: 요한계시록 풀이320, 902; 천국의 신비399, 402, 3364 [2]; 성경에 관한 새 예루살렘 교리54; 주께 대한 새 예루살렘 교리63; 새 예루살렘 교리7; 참된 기독교50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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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관한 교리 #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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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말씀이 교리를 통해 분명해질 뿐 아니라 빛이 나는 이유는 교리 없이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등불 없는 등대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교리를 통하여 이해되며 등불이 있는 등대가 되는 것이다. 그때 사람은 이전 보다 더 많은것을 보며 전에 이해하지 못하던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해서 그가 보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또는 보고 이해하지만 여전히 애매하고 모순된 것들이 교리와 일치하게 된다.

기독교계의 경험은 말씀은 교리로 이해하며 교리에 따라 해석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모든 개신교도는 말씀을 그들 나름의 교리로부터 그리고 그것에 따라 이해하고 해석한다. 가톨릭 교도와 심지어 유대인들도 그들의 교리로 부터 그리고 교리에 따라 그렇게 한다. 이와 같이 사람은 모두 거짓 교리로부터 거짓을 보고 참된 교리로부터 진리를 본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는 어둠 속의 등불이며 길 위에 이정표와 같다는 말은 명백히 옳다. 그런데 교리는 말씀의 글자의 뜻에서 이끌어낼 뿐 아니라 그것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글자의 뜻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교리의 진리는 그 안에 인간의 지혜만 있고 주님의 신적 지혜는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리는 땅 위가 아니라 공중에 떠있어 기초가 없는 집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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