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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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 하시니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 살 중의 살이라 !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Exploring the Meaning of 창세기 2      

Napsal(a) Rev. Gyu Dae Yang

창세기 2: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만물이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은 사람의 속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외적인 것과 내적인 사람에 속한 모든 지식과 인애와 신앙과 진리와 사랑에 속한 것을 만물로 표현하셨고,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에 이를 때에 마쳤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하실 일 없이 그 사람을 놔두어도 자기 스스로 영적으로 인애와 신앙에 맞춰 살아갈 수 있으므로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그래서 일곱은 거룩한 수, 완전한 수로 표현됩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영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므로 완전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살기 때문에 거룩한 날이라 표현한 것이 일곱째 날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 인간들이 쉽니다. 우리 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안식은 주님께서 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염려하시는 것을 하지 않고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주님의 쉬시게 하는 것입니다. 자아에 속한 욕심으로 세상을 위해서 날뛸 때는 주님은 한시도 그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지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정과 사랑에 속한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갈 때 누가 뭐라해도 거기서 떠나지 않고 흔들림 없는 것을 보았을 때 주님께서 안식하십니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 하셨음이더라

안식일에 창조하시던 것을 다 마치신 것을 이 모든 일은 인간이 거듭나게 하시는 일에 속한 것이므로 거룩하게 하셨고,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6일 동안 그 시련 속에 역사하시고, 인간을 영적이고 천적으로 되게 하신 후에 주님께서 쉬셨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첫째 상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거듭나고, 둘째 상태는 영적으로 거듭나서 영적인 사람이 되고 마지막 단계에서 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일곱째 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인애와 사랑에 의해서 살기 때문에 누가 뭐라해도 그 마음속에는 진실되고 참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더 훈계할 필요도 없고, 염려할 필요도 없는 것이 6일의 마지막인 일곱 번째로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날은 주님에게 있어서 안식일입니다. 성경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날에 쉬신 것이고, 또 천적 사랑이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쉬는 것은 그 모든 결합이 평화의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은 모든 시험이 끝나고 고난과 고통과 갈등이 끝나고 평안하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안식하는 상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할 일이 많습니까? 인간이 어렸을 땐 젖을 먹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아지경에서 살지만, 일단 사회에 나와서 살게 되면, 그때부터 시련의 연속입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고, 시험 보는 모든 과정과 중∙고∙대학에 다니면서 사회에 나와서 끊임없이 갈등을 겪고, 시험에 들고, 수많은 갈등 속에서 살아가다가 정년 퇴임을 한 후에 고통과 갈등이 멈춰지는 세계, 육체와 정신이 평안해지는 인생에 있어서 모든 상태를 다 극복하고 난 후의 상태는 오로지 평화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필요 이상의 고뇌와 욕심이 작용하기 때문에 늙어서도 그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에 있어서는 적어도 이 순간이 평화의 상태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시련도 고통도 또한 어떠한 문제가 주어진다 해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그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으므로 그에게는 더 이상 시련과 고통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 일곱째 날 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의 상태이고, 주님 안에서는 인성과 신성이 결합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완성된 신적 인성의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고, 사람에게는 선과 진리가 합해지는 순간이며, 그래서 영적으로 이 상태가 거듭나는 상태입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은 이날 세상적인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자아에 속한 일과 세속적인 일에 눈 돌리지 말고, 오로지 영적 선과 진리에 속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자아에 속한 일들은 주님과의 결합에 반대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기억하며 이날을 거룩하게 보내라, 6일 동안 열심히 네 모든 일을 하고 제7일에는 네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일이라’고 출애굽기 2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일간은 사람의 일을 하고 제7일은 주님을 위한 날이며, 영적으로는 주님께 속한 인간이 다시 나고 거듭나는 것, 그리고 엿새 동안은 인간이 지옥으로부터 있는 모든 악과 거짓과 싸우는 시련의 모든 과정이고, 이러한 과정을 다 극복하고 거듭난 후가 칠 일째 되는 상태입니다. 이때는 주님과의 결합이 완성되어서 지옥으로부터 어떠한 상황이 주어져도 그 사람은 보호를 받게 되고 그 사람은 어떠한 시험과 갈등도 겪지 않게 되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영적으로 모든 일을 다 끝마치고 하늘나라에 들어갔을 때 그 곳에서는 어떠한 시험과 갈등을 겪지 않게 되는 천국에서의 낙원의 생활을 나타냅니다. 이 세상에서 육을 입고 사는 한 인간의 갈등이 그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되지만 육을 벗고 저 상에 가면 더 이상 그런 구차한 일이 우리를 괴롭히는 일이 없고, 지옥으로부터 어떠한 거짓과 악이 우리를 유혹하고 괴롭게 한다 하더라도 주님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내성을 침범하고 괴로워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안식일에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창세기 2: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여호와'라 하는 성호가 처음으로 불립니다. 창세기 1에서는 하나님으로 나타냈습니다. 여호와라고 하는 성호가 쓰인 순간은 주님의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인정에 속한 일을 할 때입니다. 인간이 신앙으로 가르침 받고 신앙으로 살 때는 하나님이라는 성호만 쓰여 집니다. 그러나 인정에 속한 신앙과 선에 속한 신앙으로 살 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쓰입니다. 이제 이 모든 시련의 과정이 끝나고 거듭난 후의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명칭이 쓰였습니다.

창세기 2:4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2: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2:6 안개만 땅에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영어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므로 들에는 초목이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아직 자라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은 아직 인간이 거듭나지 아니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첫째 날, 둘째 날에 속합니다. 이 상태에 있을 때는 사람 속에 어떠한 진리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습니다.

신앙과 인정이 어떠한 것이 참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오로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 이외에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의 심정 상태를 보면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굳어 있어 완전히 돌덩이처럼 딱딱하여 내적인 것이 들어 갈래야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는 상태가 비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들에는 초목이 없고 밭에는 채소가 아직 없는 상태입니다. 들을 바라보았을 때, 나무와 숲이 파랗고 그 속에서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름답다는 표현을 하지만 황량한 들판을 보았을 때, 황폐해서 그곳에서는 추하고 더럽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독사와 독충이 우글거리는 것처럼, 거듭나기 이전 상태의 마음이 이런 것인데, 사람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므로 풀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 비를 내리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가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비를 맞지 않은 것이고, 영적으로는 깨우침의 빛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직 사람도 없고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는 것은 평화의 거듭난 후의 상태입니다. 거듭나기 이전 상태와 거듭난 후의 상태를 기록해 놓은 말씀이 2:5-6 말씀입니다.

안개가 땅에서 자욱이 올라온 상태는 이른 아침, 새벽에 들에 나갔을 때 온 세계가 조용합니다. 바람도 잠잠하고 새 울음소리나 풀벌레 울음소리도 없고, 고요한 상태에서 온 지면에 안개만 자욱한 것은 평화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상태는 사람이 거듭나서 영적으로 평안한 상태입니다. 안개는 이러한 갈등과 고난과 재난이 끝난 후의 고요한 평화의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영적으로 되는 동안 처음에는 겉 사람이 내적인 면에 순응하지 않아 속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싸움과 괴로움이 있으나, 천적으로 거듭난 후에는 겉 사람이 속사람에게 순종하고 내적으로 순종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거기에는 갈등이 없고 고통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변화로 싸움이 일어나고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갈등과 괴로움을 겪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시키고, 행동할 것인가 하는 자기 마음속의 갈등입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는 상태가 주어지는 것이 거듭나기 이전의 상태이고, 이제는 싸움이 끝나고 평화의 상태가 주어지는 것이 거듭난 후의 상태입니다. 이때가 안개가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시는 상태, 이 상태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인정과 사랑에 속한 선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더 이상 갈등도 없고, 더 이상 고통도 있을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영이 된 지라

흙으로 사람을 만드는 것은 그의 겉 사람을 만드는 것이고, 또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주님께서 영적인 생명을 불어넣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생영이 된 것은 겉 사람이 속사람이 되어서 살게 하신 것, 이제는 영적인 사람 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겉 사람은 껍질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이 먹고 싶고, 가지고 싶고,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겉 사람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신앙과 인정과 주님의 뜻으로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속 람입니다. 이것은 다 주님으로부터 신앙을 배우고 가르침을 받은 상태입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 순간이고, 그리하여 속사람에 순종하고 내적인 사람에 따라 생활할 때 비로소 생영이 된다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신앙과 인정의 세계를 받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육으로는 살아 움직이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사람이고, 죽은 사람은 육과 세상에 속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받으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오로지 돈을 벌고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켜서 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떠한 시험을 당할 때는 복종하는 것 같고 고통을 당할 때는 이것이 잘못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 같으나, 시험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아와 세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자아와 세욕에 노예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죽은 사람인 것이나, 영적인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서 알고 또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므로 그런 사람의 목적은 영적인 것을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의 것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것을 생활을 통해 얻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시험을 당하기는 하지만 이 시험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서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서 천적인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것을 지각하고 믿지만, 그 사람들은 사랑으로 우러나서 행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과 이웃을 위한 선한 생활이 목적이 됩니다. 이 일은 그 이웃을 위해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사람들이지, 누가 보거나 하라고 해서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더 이상 시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시험하여도 이미 그런 것을 다 극복한 후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주께서 그런 자들을 정복자라고 하십니다.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은 창세 때부터 겉으로 사는 사람, 내성적으로 사는 사람, 그리고 내적으로 거듭난 후에 사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든 것은 우리의 육을 흙으로 만든 것이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생기를 넣어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육체의 생명이 눈뜨게 하는 창조도 있지만, 영적으로는 영적인 가르침을 받고 신앙으로 사는 사람, 그래서 사람이 인정과 신앙이 결합된 모습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영적으로 거듭나는 생영(living soul)게 세 가지 모습으로 사람이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2:8-17 에덴동산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월라 온 땅에 둘렀으며
12. 그 땅은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언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렀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우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 때의 사람은 천적인 사람, 즉 최고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상태의 사람들은 꿈이나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천사들도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내성이 순수하고 순진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그들은 성경도 없었고, 설교할 필요도 없었고, 계시만 보여줘도 깨달아, 아는 상태의 사람을 가리켜서 천적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하나에서 열까지 선에서 나온 사랑에서 나온 생활이었기 때문에 자기 것이라는 소유의 개념이 없었고, 모두가 다 나누어 주고 서로를 위해주는 상태의 생활이었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악이 없는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이라고 하면 누구나 어렸을 때 들로 산으로 소풍을 가면, 돈에 대한 걱정도 없고 먹을 걱정 없이, 푸른 잔디와 풀과 나무가 있고 벌과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곳에서 친구들과 뛰놀던 모습을 연상합니다. 그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맑고 깨끗한 곳에서 참되고 올바른 것을 보고 듣고 배우는 있는 심정 상태가 에덴동산의 사람 상태입니다.

동편은 주님이 계신 곳이므로 주님을 상징했고, 에덴은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을 상징했고, 동산은 그 사랑에서 나온 모든 총명한 세계를 상징합니다. 천적인 사람들의 심정(마음)상태가 에덴동산이었으므로 주님만을 참 하나님으로 모셨고, 더 이상 다른 분이 필요 없었으며, 모든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서 나온 총명으로 살았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공부를 잘하면 총명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서 총명은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여기서 총명은 좀 더 아름답게, 좀 더 선하고 올바르게 인도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저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떻게 도우면 되는지 알고 그대로 행하는 상태가 총명입니다. 이 세상 재산과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자아와 세욕에 속한 총명이고, 여기서 말하는 천적이고, 최고대 교회의 사람들의 총명은 첫눈에 조그마한 몸짓 하나라도 즉시 보고 깨달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사랑과 인정을 주어야 되는지, 깨달아 알아서 행동으로 옮기는 상태이며 이런 사람들을 에덴동산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에서 나온 총명을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주는 사람들의 상태가 에덴동산입니다.

창세기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이 심정 상태가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상태이므로 그곳에 두십니다.

창세기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시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나무는 대부분이 사람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각을 뜻합니다. 나무의 특징에 따라서 그 특성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무는 잎만 무성하고, 어떤 나무는 먹을 수 없는 열매가 열리고, 또 어떤 나무는 꽃이 무성한 나무가 있고, 또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도 있습니다. 그 나무의 특성을 가지고 지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특성에 따라 그 됨됨이를 지각할 수 있으므로 나무를 가리켜서 지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가 있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있다’

보기에 아름다운 눈으로 보는 세계는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세계가 보기에 좋은 나무이고, 먹는 것인 빵이나 떡은 선에 속합니다.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을 지각하는 상태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어떤 꿈이나 환상을 보았을 때, 그 보여지는 세계를 통해서 참된 것과 선한 것을 보고 깨우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동산에 있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이러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서 그 다음 시대 사람들, 즉 고대 시대의 영적인 사람, 에덴동산의 사람을 천적인 사람, 최고대 교회의 사람들이라면 노아 홍수 이후에는 고대 교회 또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들은 계시를 통한 지각을 받을 수 없으므로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줘야 깨우침을 받는 사람들이므로 성경이 필요하여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등차로 보았을 때는 한 등차 아래에 있습니다. 그냥 척 보고 알고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고, 영적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봐서는 모르고, 가르쳐 줘야만 이해하므로 말씀을 기록하고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 깨닫게 하셨던 것이 고대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사람들은 이것도 저것도 없습니다. 천적인 사람들은 지각을 통해서 양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깨우침을 받았다면, 오늘날 시대의 사람들은 양심도 지각도 없으므로 말씀을 보아도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가르쳐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입니다.

천적인 사람들에게는 지각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에 하늘나라와 천사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고, 그들의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 있는 상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상태를 나타낸 것이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산 가운데'라는 것은 그들의 속 사람 안에, 의지 속에 그 생명의 본질이 되는 중심 속에는 생명 나무가 있었고, '생명 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랑과 신앙이며, 그들의 중심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자아와 세욕이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는 항상 주님 께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이 있었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알게 하는 것은 지식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세계는 사랑과 신앙의 세계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때부터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가리켜서 감각적이고 세상적인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세계를 다시 한번 돌이켜 말씀드린다면, 천적인 사람들은 신비한 세계를, 감각을 가지고 이용하려고 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총명과 지각을 통해서 이해했으므로, 하늘나라의 세계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감각적이고, 세상적으로 신앙을 생각하려 한다면, 그때부터는 타락이 일어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교회 진리를 신비주의라고 다른 교회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가장 참되고, 진실된 것이 이 안에 담겨 있으나, 우리가 이해하기까지는 세상적인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지식의 차원을 떠난 영적인 세계를 보고 들어야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깨우침, 각인이라 합니다. 그 깨우침의 세계가 자기중심 속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을 영안이라고 합니다. 이 상태가 우리 속마음에 와서 닿아야 그때에 비로소 이 진리가 정말 참되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것은 감각의 세계를 떠난 그 이상의 세계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생명 나무이고, 그것은 모든 사람의 가장 깊은 본질 안에 담겨 있으나, 오늘날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닫혀 감춰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세상적으로 감각적으로 타락해버렸기 때문에 본질이 되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사랑의 세계는 자기의 영혼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고, 드러나지 않습니다. 생명 나무가 감추어지고, 뒤에 나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속한 것들만 나타나 버렸습니다.

주님이 생명 나무를 심어 놓으셨다는 것은 영적인 사랑과 신앙의 세계가 그 사람들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세기 2:10-14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2: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렀으며 2: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2:13 둘쨰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렀고 2: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첫째는 비손이고, 둘째는 기혼이고, 셋째는 힛데겔이고, 넷째는 유브라네라는 네 개의 강이 흘렀습니다. 동편에 있는 것은 주님을 상징하고, 에덴은 그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이고 동산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총명한 세계입니다.

그런데 첫째 강은 비손이고 금이 있다고 함으로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총명이 흐르는 곳이라는 뜻이고, 두 번째는 기혼이고 구스 온 땅에 둘렀다는 것은 그 총명에서부터 나온 영적인 또는 내적인 지식들이 흐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 강은 힛데겔인데 앗수르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앗수르는 합리성이라고 합니다. 사물을 보고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합리성입니다. 이 합리성이 에덴으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네 번째는 유브라데 강인데 이것은 가장 외적인 지식을 상징합니다.

이 네 개의 상을 보면 생명의 질서가 어떻게 흐르고 발원이 되는지 이 말씀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질서 하면 위로부터 주님이 계시고,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지혜가 흐르는 것이고, 그것이 에덴동산이고, 그 사랑과 지혜에서 총명이 나오고, 그 총명에서 총명한 지식들이 나오고, 또 한편으로는 합리성, 이성이 주어지고, 거기에서부터 또 외적인 지식들이 나오고, 이러한 모든 것들이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에서부터 지혜가 나오고, 이러한 지혜에서 총명이 나오고, 그 총명에서 내적인 지식이 나오고, 또 거기서부터 이성이 나오고, 합리성이 나오고, 합리성에서 외적인 지식이 나옵니다.
이 원천은 주님으로부터 천국과 영계를 거쳐서 이 세상에 나오는 말단의 지식에 이르기까지 다 고리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올라가면 이 세상의 지식 그리고 인간들이 올바르게 갈려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것들, 나아가서 선과 진리에 속한 영적인 것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지혜에서 나온 총명한 것들이 결국 모두가 다 주님께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다시 여기서 2:16 이하로 내려가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과 진리에 속한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사랑과 선에 속한 것들을 자기 것으로는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주는 것처럼 해서 그 보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원망하고, 증오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는 것으로 끝날 때는 아무 원망도 나올 수 없습니다. 당연히 옳은 것이기 때문에 참이기 때문에 했을 뿐입니다.
그 보상은 주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대상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에덴동산과 거기서부터 네 개의 강줄기와 그 안에 있는 ‘실과는 따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고 하는 말씀의 속뜻이었습니다.

창세기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에덴동산에 모든 나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을 활용하고, 응용하고, 이용할 수는 있습니다. 무엇에 이용하느냐 하면, 이웃을 위한 씀씀이와 주님을 위한 씀씀이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음에 나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고, 베풀어 주신 것을 자기가 이용하고 씀씀이로 쓰고 활용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자기만의 소유로는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많은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부모님들은 자신들의 모든 사랑과 애정을 자녀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주께서 주신 것인데 대부분이 자기 것으로 착각하였기 때문에 준 것만큼 그것이 되돌아오지 않을 때는 섭섭하게 생각하고, 노여워하기도 합니다. 친구 관계에서도 네가 친구를 사랑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그 친구에게 이렇게 잘해주었는데, 그 친구는 나에게 해주지 않을 때는 섭섭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 우정은 주님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베푼 것으로 끝내야지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원망하고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은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랑과 인정과 또 진리와 총명과 지혜에 속한 모든 것들이 주님의 것이지 우리 인간들의 것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자기 것으로 삼아서 자기가 주고 배풀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보답이 되돌아오지 않을 때는 그를 원망하고, 증오하고 섭섭하게 생각되는 것이 자아와 세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창세기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막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과일을 따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글자를 생각해 보면 실과나무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그 말씀의 참뜻으로 첫째로 신앙의 세계는 신비한 세계, 영적이고 천적인 하늘에 속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감히 감각적이고, 이 세상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로는 모든 사랑과 신앙과 인정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들은 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2:18-25 아담에게 여자를 만들어 주심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짖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 때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 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니라

2:18 이후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후손들의 삶입니다. 그 세대가 지난 후에 그 후손들의 삶의 상태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말씀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글자로만 믿는다면 최초의 남자와 여자, 그 후대에 아담과 그 아내, 다 같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영적으로는 같은 사람이 아니고, 분명히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는 그 후손들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말씀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또 글자로 나타내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세대가 몇 백 년이 지났는지 몇 천 년이 지났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그들의 세대를 거듭한 후에 그들의 후손들의 삶이 이제 달라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기록해 놓은 것이 2:18부터 후 나오는 말씀인 것을 알아야 구분하여 들을 수 있습니다.

최고대 사람들은 지각이 있어서 하늘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느끼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영적인 안목이 열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천사들 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그렇게 지각할 수 있는 안목이 점점 닫혀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에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 먹고, 마시고, 입는 것, 그 이상의 것들, 심지어 마음까지도 주님의 것으로 생각했고 자기라는 관념을 가지지 않았으나, 그런데 2:18 이후에는 이제 자기 것, 내 것,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이것을 ‘자아(propurium)’라고 합니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 자기 것 만을 챙기고 싶어 하는 마음, 여기서부터 인간이 타락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도 인간들이 이렇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어느 정도는 허용해 주십니다. 이것이 그의 갈비뼈를 빼어 살을 붙여 여자를 만들어서 아내로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혼자서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말씀이고, 다른 말로 쉽게 풀이하면 그동안에는 혼자 사는 생활이 있었다는 것이고, 혼자 사는 것은 남자나 여자가 따로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을 내세우는 속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아가고 싶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해서 더 이상 주님에 의해서 인도됨에 만족하지 않고, 무언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은 대로 자기 것을 챙기고 살고 싶은 속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을 주께서 아시고 그렇게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어느 정도는 이제 그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허용해주시는 것이 배필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짖나 보시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어 이르시니

이것은 인간을 깨닫게 하는 주님의 교육 방법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지식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생각해서 호랑이, 곰, 양, 소 말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 의미는 짐승은 애정의 상징이고, 날아다니는 새는 지식이기 때문에 짐승들을 만드신 것은 선에 대한 애정을 느낀 것을 가르쳐 주고, 또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주는 방법이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만들어서 아담에게 이르러 이름을 어떻게 짖나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깨닫게 하십니다.

자아에 속한 마음이 형성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인간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그래도 선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선하게 살고 싶어 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그 진리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싶어 하고, 깨닫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먼저 주십니다.

이러한 절차가 다 주님의 뜻에 의해서 인간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여기에 나타낸 것이지, 단순히 창조의 과정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짖나 보는 것은 교육적인 방법입니다. 우리가 남을 돕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물질로 돕고, 닦아주면서 돕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글로 써서 돕고, 정치인은 올바른 정치로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웃을 돕습니다. 선은 하나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은 수백, 수천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짐승들의 이름이고 종류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천적인 진리는 하나입니다. 주님 이외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나온 지식들, 그 진리를 수행하고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방법들은 수백 가지 수천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특성들은 이름으로 표시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선하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올바로 살고 싶어 하는 방법들을 인간들에게 보여주고, 인간들이 어떻게 하겠다는 깨우침을 받게 하는 순간이 아담으로 하여금 보여주고 이름을 짓게 하는 순간입니다.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각 생물대로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 되었다. 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특성들을 보고 깨닫게 하는 주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2: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아담을 도와주는 배필이 없다는 것은 창세기 ccc 2bb18에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독처하는 것은 자기중심으로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남편과 아내가 같이 사니까 부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집안에 살더라도 각자의 마음은 완전히 등을 돌리고 따로 있게 될 때 부부라고 느껴지지 않고 혼자 있게 되는 순간이 독처하는 순간이고, 또 그 원인을 따져보면, 자기중심으로 살고 싶을 때, 자기 욕구가 충족시켜지지 않았을 때는 그런 연상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자아입니다. 자아로 사는 것이 종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순수한 자아 덩어리는 죄악이고, 생명이 없고, 죽은 것이므로, 영계에서는 자아로 뭉쳐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짐승 또는 괴물로 나타나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해골이 걸어 다니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자기중심으로만 사는 사람들의 영적인 영원한 모습입니다.

이렇게 생명이 없는 자아를 돕는 배필이라는 것은 생명이 있는 자아를 다시 결합하여 주어서 영적 생명을 얻어 살아갈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창세기 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은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 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우리가 잠잘 때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옆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아 속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과 오로지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옆에서 좋은 말을 하여도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중심적이라는 자아의 개념에 갇혀 있고,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에 그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 아무리 얘기하여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이때가 깊이 잠들어 있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대로 놔두면, 주님은 그 인간이 멸망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냈다고 하였고, 갈비뼈 형태가 안으로 오므라져 있는 것은 자아를 상징하기 때문에 자기중심으로 자기 욕심으로, 사는 형태가 갈비뼈이며, 이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명이 없는 갈비뼈 하나를 뽑아 살로 대신 채우고, 살은 피가 총하고 물이 흘러서 부드럽고 조금 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뼈에다가 살을 붙이는 것은 조금 생명이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인간이 살고 싶은 대로 살되, 그것을 조금 개선시켜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살라고 새롭게 허락해 주시는 모습이 2:21-22 갈비뼈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생명 없는 자아는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는 생각이고, 오로지 이 세상에 속한 육신과 배만 채우는데 몰두해 있는 사람들은 갈비뼈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없는 자아에 살을 붙여서 여자로 만들어진 자아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적인 자아, 이 자아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으므로 공부를 시킵니다. 또 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대학까지 나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안정된 삶은 살게 해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주님도 거기까지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위해 돈을 벌고 먹고 살고 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다음에는 그 벌어들인 것을 남을 위해서도 쓰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기기에 포함시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뼈에다 살을 붙이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에 가고 출세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했으면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그 다음에 공의로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과 행동도 거기에 곁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뼈에 살을 붙여서 여자를 만드는 것이고 생명이 있는 자아로 주님께서 새롭게 허락해 주신 세계입니다.

창세기 2:23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뼈 중의 뼈는 인간 시각에서 보았을 때 생명이 없는 것 중에 생명이 없는 자아를 말하며, 주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 인간이 자기 욕심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 주에서도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지극히 나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살 중의 살이라는 것은 거기에 인정과 신앙에 속한 것이 붙여졌을 때, 생명이 있는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살 중의 살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없는 자아에서 생명이 있는 자아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영어 성경에는 아내(wife)라고 했습니다. 이 둘이 결합한 상태는 여자라고 하지 않고 아내라고 합니다. 결합된 상태, 속사람의 자아를 가리켜서 아내라고 표현했습니다.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부모를 떠나는 것은 내적인 것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내와 결합되어서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생명이 없는 자아에서 생명이 있는 자아로 바뀌어 하나를 이루고 살아야 된다는 것, 즉 자기중심으로만 살지 말고, 이웃을 생각하고 인애와 신앙으로 결합된 하나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최고대 때는 이러한 것이 필요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공유하고, 깨끗하고, 순진하고, 천진난만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돌리고, 주님께 직접 계시를 받는 상태에서,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점 사람들은 자기 것을 챙기고 자기중심으로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솟아난 것이 혼자 사는 모습입니다. 외적으로 보았을 때, 바로 독처하는 것이었으나 그런 것을 그냥 놔둘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어느 정도 그것도 허용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아담을 데리고 가서 짐승과 새를 보이시고 이름을 짓게 하셨다는 것은 선에 속한 것과 진리에 속한 것을 보여주고 그것을 깨우치고 가르침 받도록 하시는 순서입니다.

그 다음에 생명이 없는 자아에서 생명이 있는 자아를 결합해줌으로써 자기중심으로만 사는 자에게 남을 위해 사는 것도 항상 결합하여 영적으로 다시 거듭나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둘이 한 몸으로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니라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니라’

그들 속에는 아직도 순진한 속성이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직까지도 자기 욕심으로 사는 생각이 있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남을 해친다든지, 거짓을 꾸미는 악과 거짓에 속한 속성은 없었다는 것이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그곳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에 삼층 천국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벌거벗은 어린아이가 놀고 있는 것같이 순진한 모습으로 나타나 보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아직 수치스러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엄마 아빠에게 떼를 쓸 때 부모는 그 아이가 자기 것을 챙기는 모습을 봅니다. 그것이 자아입니다. 그 자아 속에는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것은 천진난만한 자아의 모습입니다. 어린아이는 그냥 갖고 싶어서 떼를 썼을 뿐이고, 부모님이 밖에서 돌아오면 엄마 아빠를 부르면서 달려와 좋아합니다. 자기를 생각하는 마음인 자아에 속한 것은 있지만, 그래도 천진난만하기 때문에 부모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조금도 때가 묻지 않은 맑고 순수한 상태의 모습입니다.

이때의 모습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최고대 교회의 후손들의 상태입니다. 아직까지 어린아이의 심정 상태를 가지고 있는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이 상태에까지 우리가 올라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자아만으로 사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최고대 후손들은 자아로 살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결합시켰을 때는 그것은 갈빗대를 취해서 살을 붙여서 결합하는 것과 같은 생명이 있는 자아로 바뀌는 모습인 것을 나타내 보여주시고, 그러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도 저들의 마음속에 아직 순수한 마음이 남아있어서 악과 거짓에 속한 속성은 없고 천진난만한 속성이 주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져 남아있었다고 하는 것까지 보이는 것이 이 장의 말씀입니다.

    Studovat vnitřní smy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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