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Metjū 9

공부

   

1 Un Viņš, iekāpis laivā, pārcēlās pāri un ieradās savā pilsētā.

2 Un, lūk, pie Viņa atnesa paralizēto, kas gulēja gultā. Un Jēzus, redzēdams viņu ticību, sacīja paralizētajam: Uzticies, dēls, tavi grēki tev piedoti!

3 Bet, lūk, daži no rakstu mācītājiem paši sevī domāja: Šis zaimo Dievu.

4 Kad Jēzus redzēja to domas, Viņš sacīja: Ko jūs domājat ļaunu savās sirdīs?

5 Ko vieglāk pateikt: tavi grēki tev piedoti, vai sacīt: celies un staigā?

6 Bet lai jūs zinātu, ka Cilvēka Dēlam ir vara virs zemes grēkus piedot, - tad Viņš sacīja paralizētajam: Celies, ņem savu gultu un ej savās mājās!

7 Un viņš cēlās un gāja savās mājās.

8 Ļaudis, redzot to, nobijās un godināja Dievu, kas tādu varu devis cilvēkiem.

9 Un kad Jēzus no turienes gāja tālāk, Viņš redzēja cilvēku, Mateju vārdā, sēžot muitnīcā. Un Viņš sacīja tam: Seko man! Un tas uzcēlies sekoja Viņam.

10 Un notika, kad Viņš atradās mājā pie galda, lūk, daudzi muitnieki un grēcinieki nāca un novietojās kopā ar Jēzu un Viņa mācekļiem.

11 Farizeji, to redzēdami, sacīja Viņa mācekļiem: Kāpēc jūsu Mācītājs ēd kopā ar muitniekiem un grēciniekiem?

12 To redzot, Jēzus sacīja: Veseliem nav vajadzīgs ārsts, bet gan slimiem.

13 Ejiet un mācieties saprast, ko tas nozīmē: Es vēlos žēlsirdību, bet ne upuri! Es neesmu nācis aicināt taisnīgos, bet gan grēciniekus.

14 Tad atnāca Jāņa mācekļi pie Viņa un jautāja: Kāpēc mēs un farizeji bieži gavējam, bet Tavi mācekļi negavē?

15 Un Jēzus sacīja viņiem: Vai var kāzu viesi būt noskumuši, kamēr līgavainis ir pie viņiem? Bet nāks dienas, kad līgavaini atraus no viņiem; tad viņi gavēs.

16 Neviens neliek jaunas drānas ielāpu uz vecām drēbēm, jo tas drēbēs izplīsīs visā savā platumā, un plīsums būs vēl sliktāks.

17 Arī jaunu vīnu nelej vecos maisos, citādi maisi pārplīsīs; un vīns izlīs, un maisi ies bojā. Bet jaunu vīnu lej jaunos maisos, tad abi uzglabāsies.

18 Kamēr Viņš to runāja tiem, lūk, kāds priekšnieks atnāca un pielūdza Viņu, sacīdams: Kungs, mana meita tikko nomira, bet nāc, uzliec viņai savu roku, un tā dzīvos!

19 Un Jēzus uzcēlies sekoja viņam kopā ar saviem mācekļiem.

20 Un, lūk, sieviete, kas divpadsmit gadus slimoja ar asins noplūšanu, no mugurpuses pienāca un pieskārās Viņa drēbju vīlei.

21 Jo viņa sacīja sevī: Ja tikai es pieskaršos Viņa drēbēm, es kļūšu vesela.

22 Bet Jēzus, atgriezies un ieraudzījis viņu, sacīja: Uzticies, meita, tava ticība tevi izdziedināja! Un no šī brīža sieviete kļuva vesela.

23 Un kad Jēzus atnāca priekšnieka mājā un redzēja stabulnieku un trokšņotāju pūli, Viņš sacīja:

24 Atkāpieties, jo meitiņa nav mirusi, bet guļ! Un tie Viņu izsmēja.

25 Un kad pūlis bija izdzīts, Viņš iegāja un saņēma viņas roku, un meitiņa uzcēlās.

26 Un šī ziņa izplatījās visā tanī zemē.

27 Un kad Jēzus no turienes gāja tālāk, Viņam sekoja divi aklie, saukdami un sacīdami: Dāvida Dēls, apžēlojies par mums!

28 Bet tiklīdz Viņš bija atnācis mājās, aklie piegāja pie Viņa. Un Jēzus sacīja viņiem: Vai jūs ticat, ka es varu jums līdzēt? Tie atbildēja: Jā gan, Kungs!

29 Tad Viņš skāra to acis, sacīdams: Kā jūs ticējāt, tā jums lai notiek!

30 Un viņu acis atvērās; un Jēzus viņiem piekodināja, sacīdams: Lūkojiet, ka neviens to nezinātu!

31 Bet tie aizgājuši godināja Viņu visā tanī apkārtnē.

32 Kad tie bija aizgājuši, lūk, atnesa vienu mēmu, ļaunā gara apsēstu cilvēku.

33 Kad ļaunais gars bija izdzīts, mēmais sāka runāt, bet ļaudis brīnījās, sacīdami: Nekad vēl Izraēlī nav bijusi tāda parādība.

34 Bet farizeji sacīja: Ar velnu virsnieka spēku Viņš izdzen ļaunos garus.

35 Un Jēzus apstaigāja visas pilsētas un miestus, mācīdams viņu sinagogās un sludinādams valstības evaņģēliju, un dziedinādams katru slimību un katru vājību.

36 Bet, redzot ļaudis, Viņam kļuva to žēl, jo viņi bija apspiesti kā avis, kam nav gana.

37 Tad Viņš sacīja saviem mācekļiem: Pļauja gan liela, bet strādnieku maz.

38 Tāpēc lūdziet pļaujas Kungu, lai Viņš sūta strādniekus savā pļaujā!

   

주석

 

마태복음 9장의 의미 탐구

작가: Ray and Star Silverman (기계 번역 한국어)

Jesus raises Jairus's daughter.

9장


죄를 용서하기


1. 그리고 배를 타고 건너가셔서 자기 도시로 들어오셨다.

2. 그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눕힌 채로 예수께로 데리고 오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아이야, 안심하라,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다.

3. 서기관들 중 몇 사람이 속으로 말하되, "이 사람은 신성 모독하는 자라." 하더라.

4.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보시고 말씀하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에 악을 생각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말씀하셨다.

6.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니라" -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7. 그리고 일어나서, 그는 자기 집으로 갔다.

8. 군중들이 보고, 놀라고, 사람에게 그런 권세를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점진적인 계시가 이 복음의 중심 주제라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마태복음은 우리 삶에서 예수님의 임재와 능력을 점진적으로 깨닫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시작은 산상수훈, 나병, 마비, 열병의 치유, 그리고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는 장면에서 그분의 신성이 질서정연하고 순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예수님은 권세로 말씀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등 자연계에서 그분의 능력을 점차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귀신 들린 두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영적인 세계에서도 권능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다음 에피소드에서 예수님은 영적인 세계에서 그분의 권능을 더욱 드러내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읽습니다: "보라, 그들이 침대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를 주께로 데려오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아들아, 기뻐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9: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마비된 사람을 "아들"이라고 부르시면서 신성한 아버지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덧붙이심으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신성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엿들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것은 신성 모독에 해당합니다. 그들의 이해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 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인간이 이런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속으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신성 모독을 한다(9:3).

예수님은 그들이 그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여긴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너희는 왜 마음속으로 악을 생각하느냐? '너희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쉬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9:5).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죄를 용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일어나 걷는 것은 육체적인 일이지만, 용서는 주든 받든 영적인 일입니다. 화가 난 부모가 순종하지 않는 자녀에게 "일어나서 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쉽지만, 자녀가 순종하지 않는 더 깊은 원인을 먼저 이해하는 데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해는 항상 더 어려운 부분입니다. 용서는 더욱 어렵습니다.

원인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인식과 민감성,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상에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마비(필요한 일을 처리하지 못하거나 불만을 놓지 못하는 등)를 극복하려면 원인 수준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영적 원인은 무엇일까요? 원한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영적인 원인은 무엇인가요? 이러한 질문은 우리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죄의 용서로 이어지는 영적 발전의 여정에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데 수반되는 어려움을 이해하려면 죄 용서에 수반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주세요"와 같은 단순한 기도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용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열려 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죄를 확인한 후에는 그 죄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고, 주님께 고백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힘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는 죄의 욕망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뿐만 아니라 마치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성한 진리에 따른 새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1

우리가 신성한 진리를 따라 계속 살아갈 때, 우리는 (이전 에피소드에서) 예수님이 귀신들을 사람에게서 돼지 속으로, 그리고 바다 깊은 곳으로 보내셨던 것처럼 진리가 실제로 죄를 몰아내고 우리 의식의 가장 바깥으로 보낸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마찬가지로이 에피소드에서 그분은"인자 [신성한 진리]는 지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9:6).

이 기적의 비밀은 주님의 선하심과 능력이 우리가 삶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진리를 통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능력 없이 진리만으로는 우리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정확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사랑과 능력을 더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몸이 우리가 선택한 음식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영양가가 높은 음식일수록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와 힘이 더 많아집니다. 2

이 모든 것은 "인자[신적 진리]는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예수님의 주장에 담겨 있습니다(9:6). 그리스어로 "용서하다"라는 용어는 ἀφίημι(아피에미)로 "풀어주다" 또는 "보내다"라는 뜻입니다. "송금"이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돌려보내다"라는 뜻이므로 아마도 가장 가까운 용어일 것입니다. 따라서 "죄의 용서"라는 문구는 말 그대로 죄를 지옥으로 돌려보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죄의 용서"라는 구절의 더 내면적인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죄가 용서되면 죄가 송금되고, 되돌려 보내지고, 제거됩니다. 이 "죄의 제거"는 우리의 의식에서 죄를 제거하여 마음 뒤편으로 보내는 것이지, 우리 삶에서 죄를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3

예수님은 인자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선언하신 후, 중풍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9:6) 놀랍게도 중풍병자는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고, 죄가 용서되고 걷는 능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비된 사람의 영적인 필요(죄 용서)를 먼저 돌보신 다음 자연적인 필요(걷는 능력 회복)를 충족시켜 주셨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신체적으로 아프거나 장애가 있을 때 감기에 걸렸다거나 발목을 삐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원인을 파악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연약함은 더 깊은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고 치유 과정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더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아프거나 신체적으로 다쳤을 때 그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고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아프거나 영적으로 다쳤을 때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상태를 바꾸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며, 파괴적인 습관을 포기하거나 갉아먹는 분노를 놓아주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나를 내버려 둬"라고 말하며 이러한 영적 마비 상태에 집착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는 것, 즉 내면에서부터 치유하는 것이 복음서에서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장 큰 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영혼을 고치셨고 그다음에는 육체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함으로써 마비된 사람이 일어나 걸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군중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보고 "놀라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9:8). 반면 종교 지도자들은 매우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마비된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채, 예수님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의 권세를 스스로 거만하게 행사했다는 신성 모독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습니다.

군중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그러한 권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9:8). 이 구절은 군중이 예수를 여전히 사람으로 보고 있지만, 죄를 용서하는 신과 같은 권능을 포함한 특별한 능력을 받은 매우 특별한 사람으로 보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새 포도주


9. 예수께서 거기서 지나가시다가, 마태라고 하는 공물을 받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따랐다.

10. 예수께서 그 집에 앉으시니, 보라,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라.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제자들에게 말하되, "너희 선생이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느냐?" 하더라.

12. 그러나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시되, "건강한 사람은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사람은 의사가 필요하느니라.

13. 그러나 너희는 가서 그 뜻을 배우라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 함이니라."하셨느니라.

14.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주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나이까?" 하니라.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신랑이 신부와 함께 있는 한, 신부의 방에 있는 아들들이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신랑이 그들에게서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니, 그때에 그들은 금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낡은 옷에 수축되지 않은 천을 덧대어 수선하지 않나니, 이는 채우는 것이 옷에서 빠져나가서 찢어짐이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17. 또 새 포도주를 낡은 병에 붓지 아니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병이 찢어지고 포도주가 쏟아져 병이 망하고 새 포도주를 새 병에 부으면 둘 다 보존되느니라."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는 요셉에게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니라"(1:20-21). 신성한 사랑은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갈망합니다. 4 이것은 일반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복음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구속하며 이기적인 염려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다고 선언합니다. 산상수훈에서, 병자를 고치실 때, 폭풍을 잔잔하게 하실 때, 귀신을 쫓아내실 때 예수님은 이 본질적인 사랑을 나타내셨지만 완전히 드러내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죄를 용서함으로써 그분의 신성한 목적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용서하러 오셔서 그들을 자유케 하신다. 방금 살펴본 바와 같이 용서는 죄를 제거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협력과 함께 신성한 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일을 성취하시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 그분은 우리에게 신성한 진리(산상수훈)를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우리의 삶을 이끌 수 있는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둘째, 우리 스스로는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진리대로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런 식으로, 그리고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의 죄가 제거되고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5

죄 사함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당시에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죄 없는 동물의 희생을 통해서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백성의 죄'를 염소 한 마리에게 의식적으로 지워 광야로 쫓아냈습니다. 이 "희생양"의 추방은 어떻게 든 사람들의 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레위기 16:21-23). 한편, 죄인(세금 징수원 포함)은 철저하게 피해야 했으며, 그들과 사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다. 예수님은 마비된 사람을 용서하고 고치신 직후, 멸시를 받던 세리 마태에게 손을 내밀어 "나를 따르라"(9:9). 예수님은 다른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으십니다. 예수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종교 지도자들은 제자들에게 왜 스승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있느냐고 묻습니다(9:11). 그들의 기준에 따르면 종교는 죄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존경받고 교육을 잘 받은 상류층, 즉 신이 부와 특권을 축복한 사람들, 죄의 더러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뒤집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 모두를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더 이상 종교는 자신의 영광을 높이고 세상에서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하늘나라, 즉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과 우리 안에 있는 하늘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6

다시 말해, 예수님은 잘못 인도되고 자기애에 빠진 사람들로 인해 죽음의 늪에 빠진 당시의 종교를 되살리고 소생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종교 지도자들은 진정한 종교가 무엇인지, 심지어 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길을 잃고 지옥 같은 속박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선의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잘못 인도된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이 무시되는 동안에도 종교 단체의 엄격한 전통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보냈습니다.

한편, 진정한 종교가 고난을 겪고 멸종되어 가는 동안 다양한 종류의 영적 질병이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예수께서 백성의 영혼을 파괴하는 영적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오셨다고 선언하자 종교 지도자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특히 예수님이 죄인들과 사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는 금기를 노골적으로 어긴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황을 아주 다르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들을 위해 오셨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분은 "건강한 사람은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은 의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9:12).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종교의 본질에 더 집중하고 외적인 의식에 덜 집중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호세아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워라."(9:13).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진정한 사역이 양을 희생하거나 비둘기를 태우거나 황소의 피를 사람들에게 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긴 금식이나 과시적인 고통의 쇼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가르치고 사람들이 좋은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모두가 영적 성장 과정에서 서로 돕고 지원하도록 부름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돕는 것도 포함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9:13).

그러나 참된 종교는 우리의 죄악을 깨닫고 구원을 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통해 이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종교는 분명 진지한 회개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목표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찬 즐겁고 유쾌한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친구들과 함께 신랑으로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사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신랑이 신랑과 함께 있는 한 신랑의 친구들이 슬퍼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9:15).

이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가져온 새로운 아이디어 중 일부입니다. 새 옷과 새 포도주, 즉 낡은 옷에 꿰맬 수 없는 옷과 낡은 포도주병에 부을 수 없는 포도주였습니다(9:16-17). 낡은 전통의 낡은 옷과 경직된 가르침의 낡은 포도주 가죽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계속 믿었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종교는 놀랍고 충격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하러 오신 새로운 진리를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사람들은 유연하고 양보하는 자세를 가져야 했습니다. 낡은 태도를 뿌리 뽑고 경직된 신념을 뛰어넘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 포도주처럼 새로운 진리가 계속 발효되고 확장되어 결국 낡고 마른 포도주 껍질을 뚫고 나올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와인 껍질'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응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며,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계시하려고 오신 "새 포도주"는 외부의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거나 공허한 의식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계명의 지침을 따르되 새로운 눈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실천하는 새롭고 더 내면적인 믿음과 사랑의 삶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외적 의식의 종교는 내적 정화의 종교로 대체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종교는 영적 죽음 직전의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낡은 천과 낡은 포도주 껍질과 같은 거짓 사상이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내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며 돌 마음을 너희에게서 제거하고 살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는 선지자의 말씀이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에스겔 36:26).


영적 삶의 회복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그들에게 하시는 동안에, 보라, 한 관원이 와서 경배하며 이르되, "내 딸은 이제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에게 안수하시면 살리라." 하더라.

19.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따라오시니.

20. 보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병든 한 여자가, [그분] 뒤에서 와서,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니;

21. 그 여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그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으리라" 하였느니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여자를 보시고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 여자가 그 시간부터 나았다.

23. 예수께서 백부장의 집에 들어가시니 피리 부는 자들과 군중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시더라,

24.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든 것이니 가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그러나 군중이 쫓겨나자 그분께서 그 처녀의 손을 잡으시니 그 처녀가 일어나니라.

26. 그리고 이 명성이 온 땅에 퍼져 나갔다.

27.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가시니, 소경 두 사람이 그 뒤를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부르짖었다.

28. 예수께서 그 집에 이르시니, 소경[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오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하셨다. 그들은 그분께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네 믿음대로 되리라" 하셨다.

30. 제자들의 눈이 떠지니, 예수께서 훈계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하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그분의 명성을 온 땅에 퍼뜨렸다.

32. 그들이 나올 때에, 보라, 귀신 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주께로 데려왔다.

33. 귀신이 쫓겨나자 벙어리가 말을 하니, 군중들이 놀라워하며, 이스라엘에 이런 귀신이 나타난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말하기를, "귀신의 통치자가 귀신을 쫓아낸다." 하였다.


부활하는 애정


이 에피소드는 예수님께서 이전의 모든 기적을 능가하는 기적을 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시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살려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12년 동안 피의 문제"를 앓고 있는 한 여인(9:20). 그녀는 예수님의 겉옷자락만 만져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예수님께 뒤에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을 만집니다(9:21). 이렇게 하자마자 예수님은 돌아서서 여자를 보시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여자는 바로 그 순간에 치유되었습니다(9:22).

이 치유는 예수님께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어린 소녀를 살리러 가시는 길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소녀를 다시 살려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 중단된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이 앞뒤의 사건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는 그 연결이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영적인 의미에 대한 내적 이해는 몇 가지 유용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분의 옷자락"이라는 구절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서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옷"은 진리를 나타냅니다. 옷이 다양한 날씨 조건에 노출되지 않도록 우리의 알몸을 보호하는 것처럼, 진리는 우리의 순수함을 해치는 거짓 신념에 노출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합니다. 그러므로 속옷은 말씀의 내적인 진리를 나타내고 겉옷은 말씀의 외적인 문자 그대로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의 겉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주님께서 말씀의 가장 문자적인 진리, 즉 "옷자락"을 통해 우리에게 치유의 능력을 전달할 수 있다는 진실한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는 주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 연약함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담고 있습니다. 7

하지만 이 여인은 무언가를 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행동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 다가가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행동해야 하고 첫 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주님의 치유 능력이 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말씀을 통해 흘러나올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말씀을 읽는 것처럼 단순한 일이라도 우리의 믿음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8 그리고 우리가 사랑과 믿음을 마음에 품고 이렇게 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면의 치유를 경험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던 영적 생명("피의 문제")의 점진적인 고갈이 멈추고 새로운 생명을 받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의지가 우리 안에서 탄생하고 있습니다. 9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은 여정을 계속하십니다. 죽은 소녀의 집에 도착한 예수님은 어린 소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수많은 조문객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최근에 참된 종교를 엄숙한 의식, 희생, 외적인 의식으로 이루어진 생명이 없는 행렬이 아니라 즐거운 경험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를 낡은 옷과 낡은 포도주 가죽에 비유하셨습니다(참조 9:15-17). 예수님께서는 참된 종교를 결혼식에 비유하시면서 종교적 삶은 신랑과 친구들이 결혼식을 축하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다음 에피소드에서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애도의 집은 통곡과 애통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분명 기쁨의 장소가 아닙니다.

참된 종교의 기쁨과 장례식 장면 사이의 불일치가 눈에 띕니다. 참된 종교는 죽음이 아닌 삶에 관한 것이며, 더 내면적으로는 영적 죽음을 넘어 더 높은 수준의 영적 삶으로 고양되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영적 생명을 상실하든(피를 흘리던 여인), 영적 생명을 완전히 상실하든(죽은 소녀),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고 온전한 생명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오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소녀의 치유는 이 중요한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또한 죽어가는 종교 체계를 부활시키기 위해 오신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애도하는 사람들을 흩으시는 것으로 시작하신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니 자리를 비켜라"(9:24). 소녀가 죽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들은 그분을 비웃으며 비웃습니다"(9: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군중을 밖으로 내보내시고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기적적으로 소녀를 살리십니다. 우리 삶에서도 '애통하는 자들'은 주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우리 안방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두려움, 불안, 원망, 낙심 등 우리를 영적 죽음의 상태에 머물게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쫓겨나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낙담하는 감정을 쫓아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든, 낙담하고 있든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기에는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꿈이 잠잠해졌다고 해서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임종을 둘러싸고 있는 슬픔에 잠긴 영혼들에게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으니 떠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9:24).

죽은 것처럼 보였던 소녀가 살아난 것은 우리의 진정한 애정, 즉 하느님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하려는 애정이 다시 깨어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좋은 소식은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애정은 종종 잠들어 있지만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몰아내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치유하시는 주님의 능력(혈루증 여인으로 상징되는)을 믿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피의 문제(영적 활력의 점진적 상실)가 멈추면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의 영적 삶(죽은 소녀가 살아나는 것으로 상징됨)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눈 뜨기


죽은 것처럼 보였던 소녀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종종 우리가 활기차고 의욕이 넘치며 진정으로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동기 부여가 없는 '영적 죽음' 상태에서 우리를 깨우시는 방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이 다음 기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해석의 또 다른 법칙을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여성은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측면을 나타내는 반면, 남성은 지적이고 사고하는 측면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10

그래서 다음 기적인 두 맹인의 치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본성의 다른 면, 즉 지적이고 생각하는 면을 어떻게 치유하시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진리가 제시 될 때 진리를 볼 수있는 측면입니다.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겠다", "보지 못하는 자만큼 소경은 없다"와 같은 일상적인 표현은 육체적 시각과 영적 시각 사이에 깊은 상징적 연관성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다음 기적에 묘사된 것은 바로 이러한 영적 시력, 즉 이해력의 치유입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죽음처럼 보였던 소녀를 깨우신 후 그 소녀의 집을 떠나실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방금 두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여정을 계속하실 때, 두 맹인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예수님을 따라오고 있습니다. (9:27). 앞선 기적에서 우리는 애정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서히 죽어 가거나 심지어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되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적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들에게 시력을 주시는 것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이해력이 치유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손길로 그들의 육신의 눈을 뜨게 하셨을 때, 우리의 영적인 눈도 뜨게 하셔서 영적인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눈이 열리고"(9:29). 그러나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라."라고 그는 말합니다.9:30). 11


우리의 무뚝뚝함을 치유하기


이 일련의 기적의 다음 치유는 벙어리이자 귀신 들린 남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귀신이 쫓겨나자 벙어리 남자가 말하였다"는 구절을 보면 귀신 들림이 그 남자의 벙어리와 관련이 있음이 분명합니다(9:33). 경전 전체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특히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새 생명을 축하하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라고 권면받습니다. "오, 주님께 새 노래를 불러라! . . . 주님께 기쁨으로 외치며 노래하며 기뻐하며 찬송하라"(시편 98:1, 4); “너희 모든 땅이여, 주님께 기쁨으로 외치라"(시편 100:1); “주님을 찬양하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좋으니라"(시편 147:1); 그리고 시편의 마지막 줄은 "숨이 있는 모든 것이 여호와를 찬양하게 하소서"(시편 150:6).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이며,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죄에서 해방된 것에 대한 감사, 우리를 둘러싼 풍성한 축복에 대한 감사, 우리가 받은 새 생명에 대한 감사 등 감사로 가득 찬 놀라운 행복과 만족의 상태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상태에서는 입술에서 솟아나는 자연스러운 찬양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시면 내 입이 주님을 찬양하리이다"(시편 51:15).

따라서 기쁨과 찬양, 감사는 종교, 특히 죽음이 아닌 삶에 관한 종교에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많은 축복을 나열하실 때 마지막 축복은 기쁨과 감사의 표현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뻐하고 심히 기뻐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5:12). 예수님은 침묵의 악마를 쫓아내시면서 이 사람이 내면의 기쁨을 표현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의도하신 기쁨입니다.

이 일련의 치유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이 환희에 찬 기쁨의 상태로 인도하시는지를 요약해 줍니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읽으려는 우리의 첫 번째 노력을 통해 영적 생명의 상실을 막으시고(옷자락을 만진 여인), 우리의 애정에 다시 불을 붙이시고(죽은 듯이 보였던 소녀를 살리심), 우리의 이해를 열어 주시고(두 눈먼 사람),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에 대해 느끼는 내면의 기쁨을 찬양의 말과 감사의 표현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벙어리 남자의 치유).


다양한 반응


군중은 이러한 신성한 역사를 놀라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놀라워합니다(9:33). 본능적으로 그들은 이것이 숨이 멎을 정도로 다른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다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그는 귀신의 통치자가 귀신을 쫓아낸다"(9:34). 이 극적으로 다른 반응은 이 복음에서 우리 각자의 앞에 놓인 결정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서를 치유하시고, 우리의 이해를 깨우쳐 주시고,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하시는 놀라운 방법에 경외와 감사로 응답합니까? 아니면 "귀신의 통치자가 귀신을 쫓아낸다"며 의심과 불신으로 반응합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우리는 종종 초자연적인 도움 없이도 스스로 소생하고, 영적 진리를 이해하고,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진리를 배우고 삶에 적용함으로써 그 힘에 우리 자신을 더 많이 맞출수록 우리는 더 많은 힘을 얻게 됩니다. 그 동안 우리 영혼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활력의 상실을 조용히 멈추게 하시고, 우리의 애정을 회복시키며,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입술을 열어주시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12

실용적인 응용


우리 삶에서 관계가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거나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오해가 풀리지 않아서 몇 시간 또는 며칠 동안 돌 같은 침묵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이때는 말씀의 능력을 믿고(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기 위해), 우리의 원래 애정이 깨어나도록 기도하고(죽은 소녀가 살아나기 위해), 상황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구해야 할 때입니다(소경이 보게 됨). 이렇게 하면 입술이 열려서 우리가 하고 싶지 않았던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용서를 구할 수 있는 힘까지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벙어리가 말을 합니다).

이 일련의 기적은 우리 각자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연민으로 감동하십니다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들의 모든 병과 모든 질병을 고치셨다.

36. 예수께서 군중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기진하여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37.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되, "추수할 것은 참으로 많으나 일꾼은 적다.

38.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의 주께 간청하여 그분께서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시도록 하라."


예수께서 점차 그분의 신성한 정체성을 드러내시자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군중들은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워합니다. 동시에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영향력이 위협받는 것을 보고 분노를 느낍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탄의 권능을 불러내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주장합니다.

믿는 군중과 믿지 않는 종교 단체는 모든 인간에게 상반된 태도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 평형을 유지하게 하는 방법이며, 주어진 순간에 그분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 신실한 군중과 믿을 수 없는 종교 지도자가 우리 각자에게 존재하며, 우리는 어느 순간 영적 세계의 천국과 지옥의 영향을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기 위해 (그분의 계명에 따른 삶을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성장하는 믿음을 공격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옥의 동등하고 반대되는 영향력에 직면하게 됩니다. 13

이 에피소드에서 "무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감지하는 우리 각자의 순수한 생각과 부드러운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종종 이러한 생각과 애정은 흩어진 감정, 선한 것에 대한 직관, 진리에 대한 직감, 유용하려는 성향이 무질서하게 뭉쳐진 덩어리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감정은 선하고 진실하며 유용하지만, 목자가 없는 약하고 흩어진 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양들이 무질서하고 흩어져 있는 한, 그들은 삼키기를 열망하는 늑대들의 쉬운 먹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처럼 지치고 흩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9:3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사역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이제 (선과 진리의) 씨앗을 심고 (사랑과 지혜의) 수확을 거둘 때입니다: "추수는 참으로 풍성하나 일꾼은 적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9:37).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권면으로 결론을 맺으십니다: "추수의 주께 기도하여 그분의 추수에 일꾼을 보내 주시기를 구하라"(9:38).

영적 성장과 관련해서는 이제 진지해져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삶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조직적이고 신중하며 집중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해야 할 중요한 일, 수행해야 할 중요한 용도, 그리고 육체적, 영적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분의 포도원으로 부르시고 우리 각자에게 고유하게 설계된 개인적인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수확의 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9:9). 이제 사도가 될 시간입니다.

각주:

1참된 기독교 528: “진정한 회개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기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사람의 구원이 회개에 달려 있기 때문에 회개 행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주님의 많은 구절과 평범한 말씀이 있습니다."

2천국의 신비 3091: “진리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힘은 사실 진리를 통해 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참조 항목 결혼의 사랑 122-123: “주님으로부터 발산되고 흘러 들어오는 선과 진리의 결혼에서 사람은 진리를 얻고 주님은 선에 합류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얻은 진리에 선을 붙이시고 선에 합류하십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얻고, 주님은 그 진리가 사용됨에 따라, 따라서 사람이 현명하게 생각하고 현명하게 살려고 노력할 때 그 진리에 선을 결합시킵니다."

3천국의 신비 9937: “죄의 용서는 그것들을 [옆으로] 제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는 사람에게 남아 있지만, 사랑의 선과 믿음의 진리가 심어지는 한 악과 거짓은 제거됩니다." HD 170도 참조: "악에서 보류되고 선에 머무르는 것은 죄 사함을 구성한다.... 악이 아닌 선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죄 사함의 결과입니다." 천국의 신비 5398: “죄는 결코 누구에게서나 지워질 수 없지만, 주님에 의해 선하게 유지되는 사람은 분리되고 거부되어 일어나지 않도록 옆으로 보내집니다."

4묵시록 설명 386: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이는 신성한 사랑으로 인류의 구원을 원하셨고 원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천국의 신비 8393: “죄는 입의 회개를 통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삶의 회개를 통해 용서받습니다. 주님은 자비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죄는 주님에 의해 계속 용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 사람이 아무리 용서 받았다고 생각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붙어 있으며, 믿음의 계명에 따른 삶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사람에게서 제거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이 명령에 따라 사는 한, 죄는 제거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제거되는 한, 그것들은 용서받은 것입니다."

6천국과 지옥 319: “천국은 사람 안에 있으며, 사람 안에 천국이 있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갑니다. 사람 안에 있는 천국은 신성을 인정하고 신성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참조 항목 천국의 신비 8153: “신성한 것이 높은 것으로 표시된 것은 별이 빛나는 하늘이 천사의 하늘을 의미하고 또한 천사가 거기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현명한 사람들은 하늘이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이 있는 곳이며,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7요한계시록 풀이 45: “단어에서 '의복'은 진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겉옷인 긴 겉옷은 주님에 대해 말할 때 신성한 진리가 발산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참조 천국의 신비 9917[2]: “'옷자락'이 자연이 있는 가장 외적인 부분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사야서에서 '내가 보좌 위에 높이 들린 채로 앉으신 주님과 그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았노라'(이사야 6:1). 주님이 앉으신 '보좌'는 하늘을 의미하며, 그곳의 '옷자락'은 문자적 의미에서 말씀의 진리와 같이 가장 낮거나 가장 외적인 수준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8. 드베르보 20: "영적 세계의 모든 권능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한 진리에 속하며... 신성한 진리의 모든 권능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있습니다."

9천국의 신비 4353[3]: 이해에서 행하는 것은 마침내 의지에서 행해져서 마침내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이나 내면에 심어지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진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에서 선을 행하게 됩니다."

10천국과 지옥 368: “'청춘' 또는 '남자'는 영적인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이해를, '처녀' 또는 '여자'는 선에 대한 애정을 뜻합니다."

11. 마가복음에서 우리는 왜 주님께서 때때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행하신 일에 대해 말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때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할 것입니다. 성서학에서는 이를 "메시아의 비밀"이라고 부릅니다.

12천국의 신비 5202[4]: “선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인생의 마지막 단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영원히 매 순간 거듭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면뿐만 아니라 외면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이러한 거듭남에는 놀라운 과정이 수반됩니다."

13천국과 지옥 595: “지옥은 끊임없이 천국을 공격하고 천국을 파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악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선으로 그들을 붙잡아 두심으로써 천국을 계속 보호하십니다. 나는 종종 지옥에서 흘러 나오는 구체를 인식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신성을 파괴하려는 노력의 구체이며 따라서 천국입니다." 참고 문헌 천국과 지옥 599: “사람이 자유를 얻고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영은 천국과 지옥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지옥에서 온 영과 천국에서 온 천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에 빠지는 것은 지옥을 통해서이고,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선에 빠지는 것은 하늘에서 온 천사를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영적 균형, 즉 자유에 있습니다."

성경

 

Matthew 10:22

공부

       

22 You will be hated by all men for my name's sake, but he who endures to the end will be sa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