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Máté 14

공부

   

1 Abban az idõben hírét hallá Heródes negyedes fejedelem Jézusnak,

2 És monda szolgáinak: Ez ama Keresztelõ János; õ támadt fel a halálból, és azért mûködnek benne az erõk.

3 Mert Heródes elfogatta vala Jánost, és megkötöztetvén, tömlöczbe vetette vala Heródiásért, az õ testvérének, Fülöpnek feleségéért.

4 Mert ezt mondja vala néki János: Nem szabad néked õvele élned.

5 De mikor meg akarta öletni, félt a sokaságtól, mert mint egy prófétát úgy tartják vala õt.

6 Hanem mikor a Heródes születése napját ünnepelék, tánczola a Heródiás leánya õ elõttük, és megtetszék Heródesnek;

7 Azért esküvéssel fogadá, hogy a mit kér, megadja néki.

8 A leány pedig, anyja rábeszélésére, monda: Add ide nékem egy tálban a Keresztelõ János fejét.

9 És megszomorodék a király, de esküjéért és a vendégek miatt parancsolá, hogy adják oda.

10 És elküldvén, fejét véteté Jánosnak a tömlöczben.

11 És elõhozák az õ fejét egy tálban, és adák a leánynak; az pedig vivé az õ anyjának.

12 És elõjövén az õ tanítványai, elvivék a testet, és eltemeték azt; és elmenvén, megjelenték Jézusnak.

13 És mikor ezt meghallotta Jézus, elméne onnét hajón egy puszta helyre egyedül. A sokaság pedig ezt hallva, gyalog követé õt a városokból.

14 És kimenvén Jézus, láta nagy sokaságot, és megszáná õket, és azoknak betegeit meggyógyítá.

15 Mikor pedig estveledék, hozzá menének az õ tanítványai, mondván: Puszta hely ez, és az idõ már elmúlt; bocsásd el a sokaságot, hogy menjenek el a falvakba és vegyenek magoknak eleséget.

16 Jézus pedig monda nékik: Nem szükség elmenniök; adjatok nékik ti enniök.

17 Azok pedig mondának néki: Nincsen itt, csupán öt kenyerünk és két halunk.

18 Õ pedig monda: Hozzátok azokat ide hozzám.

19 És mikor megparancsolá a sokaságnak, hogy üljenek le a fûre, vevé az öt kenyeret és két halat, és szemeit az égre emelvén, hálákat ada; és megszegvén a kenyereket, adá a tanítványoknak, a tanítványok pedig a sokaságnak.

20 És mindnyájan evének, és megelégedének; és felszedék a maradék darabokat, tizenkét teli kosárral.

21 A kik pedig ettek vala, mintegy ötezeren valának férfiak, asszonyokon és gyermekeken kívül.

22 És mindjárt kényszeríté Jézus az õ tanítványait, hogy szálljanak a hajóba és menjenek át elõre a túlsó partra, míg õ elbocsátja a sokaságot.

23 És a mint elbocsátá a sokaságot, felméne a hegyre, magánosan imádkozni. Mikor pedig beestveledék, egyedül vala ott.

24 A hajó pedig immár a tenger közepén vala, a haboktól háborgattatva; mivelhogy a szél szembe fújt vala.

25 Az éjszaka negyedik részében pedig hozzájuk méne Jézus, a tengeren járván.

26 És mikor látták a tanítványok, hogy õ a tengeren jára, megrémülének, mondván: Ez kísértet; és a félelem miatt kiáltozának.

27 De Jézus azonnal szóla hozzájuk, mondván: Bízzatok; én vagyok, ne féljetek!

28 Péter pedig felelvén néki, monda: Uram, ha te vagy, parancsolj, hogy hozzád mehessek a vizeken.

29 Õ pedig monda: Jövel! És Péter kiszállván a hajóból, jár vala a vizeken, hogy Jézushoz menjen.

30 De látva a nagy szelet, megrémüle; és a mikor kezd vala merülni, kiálta, mondván: Uram, tarts meg engem!

31 Jézus pedig azonnal kinyújtván kezét, megragadá õt, és monda néki: Kicsinyhitû, miért kételkedél?

32 És a mikor beléptek a hajóba, elállt a szél.

33 A hajóban levõk pedig hozzámenvén, leborulának elõtte, mondván: Bizony, Isten Fia vagy!

34 És általkelvén, eljutának Genezáret földére.

35 És mikor megismerték õt annak a helynek lakosai, szétküldének abba az egész környékbe, és minden beteget hozzá hozának;

36 És kérik vala õt, hogy csak az õ ruhájának peremét illethessék. És a kik illeték vala, mindnyájan meggyógyulának.

   

주석

 

마태복음 14장의 의미 탐구

작가: Ray and Star Silverman (기계 번역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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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참수된 세례 요한


1. 그 때 총독 헤롯이 예수에 관한 보고를 들었습니다;

2.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 권능이 그에게서 역사한다."

3. 헤롯이 요한을 붙잡아,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그를 결박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4. 요한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그녀를 갖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5. 예수께서 그를 죽이려 하셨으나 군중이 그를 선지자로 여겼으므로 두려워하셨다.

6. 그러나 헤롯의 생일을 지킬 때 헤로디아의 딸이 그 가운데서 춤을 추며 헤롯을 기쁘게 하였다.

7. 이에 헤롯이 맹세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니라.

8.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의 압력을 받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접시에 담아 내게 주시오"라고 선언했습니다.

9. 왕은 미안했지만 맹세를 위해, 그리고 [그와 함께 앉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10. 그리고 보내어, 그는 감옥에서 요한을 참수했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접시에 담아 처녀에게 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어머니에게 가져 왔습니다.

12. 그분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와서 예수께 보고하니라.


종교 지도자들만이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헤롯 안티파스라고도 알려진 로마 총독 헤롯도 마찬가지입니다. 1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예수의 '권능의 일'이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만의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세례 요한이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이러한 권능이 그에게서 작용하고 있습니다."(14:2).

다음 구절에서 헤롯 안티파스가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믿는 이유를 살펴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 남자 아이들을 모두 학살하도록 명령한 로마 왕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2:16). 역사가들은 헤롯 안티파스(헤롯의 아들)가 형의 아내에게 너무 매혹되어 아내와 이혼하고 처제와 결혼했다고 알려줍니다. 세례 요한이 형의 아내와 간통한 것에 대해 헤롯에게 대면했을 때 헤롯은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말을 아끼지 않은 세례 요한은 헤롯의 행동이 계명에 어긋난다는 것을 헤롯에게 알렸습니다. 세례 요한은 "네가 그녀를 갖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14:4).

헤롯 안티파스의 이야기와 요한의 비판에 대한 그의 반응은 모든 형태의 비판, 특히 우리의 도덕적 결함을 드러내는 비판에 대해 깊이 분개하는 인간의 낮은 본성의 측면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헤롯은 세례 요한을 체포하여 감옥에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4:12).

몇 년 후, 처제와의 불법 결혼을 계속하면서 헤롯은 의붓 딸이라는 새로운 열광을 갖게됩니다. "헤롯의 생일을 축하 할 때 헤로디아의 딸이 그들 앞에서 춤을 추며 헤롯을 기쁘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4:6). 수많은 역사가와 예술가들은 헤로디아의 딸을 헤롯의 어두운 욕망을 불러일으킨 팜므파탈, 요염한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이 헤롯의 의붓딸의 본성은 아닐지 모르지만, 헤롯이 젊은 여인의 춤에 매료되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맹세한 것은 분명합니다. 젊은 여인은 헤롯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세례 요한의 머리를 여기 쟁반에 담아 내게 주시오"(14:8). 헤롯은 소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즉시 감옥에 갇힌 요한의 목을 참수하라고 명령합니다. 헤롯의 명령이 실행되었다는 증거로 요한의 목을 접시에 담아 어린 소녀에게 건네고, 소녀는 그 목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건네줍니다( 14:10-12).

이 모든 것이 예수의 기적에 대해 들었을 때 헤롯의 반응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사람은 세례 요한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끔찍한 죄에 시달리는 헤롯이 자신의 잘못을 상기시키기 위해 세례 요한이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믿는 것일까요? 특히이 에피소드를 내적 의미에 비추어 볼 때 그럴 수 있습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세례 요한은 말씀의 편지의 명확한 가르침을 대표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말씀의 가장 분명하고 직접적인 가르침(세례 요한)을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와 같은 피할 수 없는 진리와 함께 그 분명한 가르침이 우리 마음속에서 계속 떠오릅니다.

요한은 자신이 대표하는 말씀의 문자 그대로의 진리처럼 헤롯에게 "당신이 그녀를 갖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습니다."라고 의심의 여지없이 말했습니다. 투옥이든 참수든 그 어떤 부정도 요한이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말씀의 진리는 신성한 기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퇴화


이 에피소드 바로 앞의 재생 비유는 영적 발전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참수 사건에 관한 이야기의 세부 사항에서 우리는 사람이 탈 생성, 즉 무지의 어둠과 방종의 불길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연속적인 단계에 대한 대표적인 그림을 보게됩니다. 이 과정은 우리의 낮은 본성의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없어야 할 것을 갈망하는 우리의 일부이며,이 경우에는 간음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가르침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요한을 감옥에 가두는 것), 심지어 그 가르침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요한을 참수하는 것).

일시적으로 우리를 붙잡는 유일한 것은 군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에 많은 무리를 두려워했습니다."(14:5). 이러한 맥락에서 무리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심어져 있는 선과 진리의 측면, 즉 신성한 진리의 거룩함을 감지하는 우리의 일부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여전히 말씀, 특히 십계명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존중하는 우리의 일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그[세례 요한]를 선지자로 여겼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는 무리의 목소리는 더 이상 헤롯을 제지할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비록 "왕이 미안해했다"(14:9),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의 살해를 명령합니다.

이 에피소드에 요약된 헤롯의 영의 타락은 우리 삶에서 죄가 어떻게 진행될 수 있는지에 대한 놀라운 그림을 보여줍니다. 죄는 우리가 말씀의 신성을 부인하고 말씀의 문자를 무시하기로 결정할 때 시작됩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을 투옥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지만 우리 삶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 특히 십계명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돌아올 때, 우리의 어두운 면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은 요한을 완전히 거부하고 우리 삶에서 제거해야한다고 결정합니다. 요한은 죽어야 합니다. 헤로디아의 유혹과 딸의 유혹은 우리를 더 어둡고 폭력적인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이 퇴행적 과정의 여러 단계를 나타냅니다. 결국 요한은 살해당하고 그의 머리는 쟁반에 담겨 반입됩니다.

이 암울한 에피소드가 끝날 무렵, 요한의 제자들이 시신을 가져다가 묻은 다음 예수님께 사랑하는 지도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리기 위해 떠난다는 내용을 읽습니다(14:12). 요한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돌보는 요한의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말씀을 무시하고 거부하고 심지어 훼손할 때에도 말씀의 문자 그대로의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말씀에 대해 무슨 짓을 하든 말씀은 우리가 가장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우리의 일부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기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혼자서 한적한 곳으로 떠나시니, 군중이 듣고 도시에서 걸어서 그분을 따랐다.

14. 예수께서 나가사 많은 무리를 보시고 긍휼히 여기사 병든 자들을 고치시니.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그 곳은 인적이 없고 이미 시간이 지났으니, 군중을 보내어 마을로 들어가서 먹을 것을 사게 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니라.

16.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들은 갈 필요가 없으니 너희가 그들에게 먹으라." 하셨다.

17. 제자들이 예수께 이르되,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18.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내게로 데려오라." 하셨다.

19. 그리고 군중들에게 풀밭에 엎드리라고 명하시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시며,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은 군중들에게 주셨다.

20. 제자들이 다 먹고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광주리에 가득히 담아 가니라.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남자만 오천 명이더라.


요한의 참수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떠나 혼자 계십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에 슬퍼할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이 고립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십니다(14:14). 2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보다 우선하는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퍼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할 모든 이유가 있으셨지만, 군중의 필요에 감동하시고 연민으로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좌절이나 실망으로 슬퍼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봉사의 소명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연민으로 감동합니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무리를 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고 시간이 늦었습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무리를 보내어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14:15). 아직 훈련 중인 제자들은 군중을 향한 동정심이 부족한 반면, 예수님은 군중을 향한 큰 동정심을 보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내시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은 갈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된다"(14:16).

제자들은 놀라고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배고팠습니다. 제자들에게는 그들을 모두 먹일 수 있을 만큼의 양식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실 제자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모두 먹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의 혼란을 이해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더 큰 계획을 염두에 두고 계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내게로 데려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이 경우처럼 말씀에 '빵'과 '물고기'라는 이중성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더 깊고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이중성은 선('빵')과 진리('물고기')라는 신성의 두 가지 본질적인 측면을 나타냅니다. 3

"빵"이라는 단어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으로 인해 선과 사랑, 그리고 그것이 자라는 좋은 땅과 연관되어 있고, "물고기"라는 단어는 차가움과 단단한 뼈로 인해 진리와 지성과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물고기가 헤엄치는 맑고 시원한 물(진리의 상징이기도 함)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종합하면 선('빵')과 진리('물고기')의 자질은 하나님의 본질을 구성합니다. 이 비유와 그 뒤에 나오는 많은 비유의 내적 의미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기본 상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제자들이 드린 것을 축복하십니다. 영적으로 이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사랑과 진리를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많은 무리를 먹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때때로 우리 가족의 필요를 채울 만큼의 사랑도, 매일 우리에게 닥치는 도전에 대처할 만큼의 지혜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져다 드리면, 그분은 우리의 노력을 축복해 주시고 놀랍게도 이미 받은 사랑과 진리를 배가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안과 주변의 무리가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은 떼어 무리에게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먹고 배불리 먹었고 제자들은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담았습니다."(14:19-20).

지속적인 내적 의미에 비추어 볼 때,이 놀라운 기적은 실제로 중생의 비유에서 가르치는 교훈의 연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수용적인 마음의 좋은 땅에 좋은 씨앗을 심으십니다(13:2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물의 근원으로 인정하는 마음이며, "값진 진주"를 발견한 마음입니다.13:46). 이러한 인정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고 선한 일을 "백 배나"(13:23). 빵과 물고기의 증식에서 우리는 이 진리가 기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씨앗이 번식하여 풍성한 수확을 이루고 강과 바다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보충하는 방식에서 신이 역사하는 것을 보고 인정합니다. 자연의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더 큰 기적을 행하시며 우리 각자를 위해 영적으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보여 주십니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 그분의 축복과 그분이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사랑(빵)으로 채우시고 그분의 진리(물고기)로 영감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연의 힘에 대한 그분의 권능을 보여 주신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그분은 이전에 파도와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을 때 우리 각자에게 가져다 주실 수 있는 평온과 평화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그저 앉아서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8:27). 하지만 이번에는 제자들의 역할이 매우 다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 빵과 물고기를 가져다 드리고 군중을 먹이는 등 기적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예수님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영혼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생생하고 중요한 역할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우리 모두는 줄 수 있는 사랑이 풍성하고 나눌 수 있는 진리가 있을 것입니다.


실제 적용


예수님은 음식을 나눠주기 전에 감사를 드립니다. 마치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이루어질 이 기적에 감사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요청이 허락되기 전에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아이들을 무사히 집으로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아직 떠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이번 회의에서 모두가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감사합니다."(아직 회의가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감사로 시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물 위를 걷다


22. 예수께서 곧바로 제자들에게 배에 들어가서 그분보다 먼저 반대편으로 가라고 하시고, 군중들을 보내셨다.

23. 군중들을 보내시고, 예수께서는 혼자서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다가, 저녁이 되자, 혼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으므로, 파도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25. 밤 넷째에 예수께서 그들에게로 가셔서, 바다 위를 걸어가시니.

26.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이것은 유령이다" 하고 놀라며, 두려워서 부르짖었다.

27. 그러나 곧바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믿음을 가지라, 내가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다.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저를 명하사 물 위로 주께로 오게 하소서." 하니.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라."하시니,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나아왔다.

30. 그러나 그는 강한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31. 예수께서 곧바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하셨다.

32. 그들이 배에 올라타자 바람이 고요해지더라.

33. 배에 있던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여 이르되,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니라.


스승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심하게 훈련시키시며 사역을 위한 준비를 시키십니다. 물론 개별 사역에 관계없이 중심 교훈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을 삶의 중심으로 여기며, 항상 그분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흔들림이 있다면, 그들은 흔들리고 실패할 것입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예수님은 이 진리를 가장 생생한 방식으로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다로 데리고 가셔서 배에 태워 보내십니다. 그 사이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고 저녁까지 그곳에 머물러 계십니다.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동안 제자들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배는 이제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파도에 휩쓸렸습니다."(14:24).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배에 함께 모였을 때 또다시 폭풍이 몰아치고 바다가 거칠게 요동쳤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잠든 것처럼 보이는 배 안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함께 계시지만 우리를 돌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영적 유혹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분이 완전히 부재한 것처럼 보이며 더 깊은 유혹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님은 결코 잠들지 않으시고 결석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장 큰 고난의 시기에는 그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와 친밀하게 함께하시며 우리가 보지도 감지하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은밀하게 지탱하고 지원하십니다. 5

이 영적 진리는 예수님께서 폭풍우에 휩쓸린 배를 향해 물 위를 걸어가시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인 밤의 네 번째 시계로, 아직 어두워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가시는 것을 보았을 때 '귀신이다'라고 말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외쳤습니다."(14: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위로하시며 "기운 내십시오. 그것은 나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14:27). 베드로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분이 정말 유령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증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주님이시여, 저를 명하사 물위로 주께로 오게 하소서"(14:28).

이전 에피소드에서 제자들은 무리를 먹였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기적에 참여했지만 그들 자신은 기적적인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제자들은 놀라운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지만, 그들이 어떤 기적을 행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치유도 없습니다. 기적도 없습니다. 귀신을 쫓아낸 일도 없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리 오라"는 간단한 말씀("이리 오너라")을 하셨을 때 이 모든 것은 곧 바뀔 것입니다.14:29).

그리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예수님을 향해 물 위를 걷기 시작하는 진정한 기적이 일어납니다(14:29). 여기서 우리는 단순하고 신뢰하는 믿음의 아름다운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제자들을 위한 첫 번째 위대한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물 위를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풍랑'에 주의를 돌리자마자 두려움에 휩싸여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바다에 가라앉으면서 그는 예수님께 '주님, 저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부르짖습니다."(14:30).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고 둘은 함께 배에 탔습니다.

우리 삶에는 때때로 하나님의 가장 깊은 임재에 대한 인식을 몰아내는 일상의 요구와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인한 소음과 소란으로 인해 우리의 주의가 '광풍'에 휩쓸릴 때가 있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지 의심할 때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정말 그곳에 계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주님, 주님이라면 ..."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임재나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께로 나아가도록, 우리의 안전 지대에서 벗어나 그분만을 신뢰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이 발걸음을 내딛을 때 우리는 오른쪽도 왼쪽도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소란스러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6

물론 우리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의심과 불신, 실망과 절망에 빠져 길을 잃고 궤도에서 벗어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두 팔을 뻗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를 위해 함께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했느냐?" (14:31). 7

잠시 후 예수님과 베드로는 배에 함께 있었고 모든 것이 잘되었습니다: "그들이 배에 올라타자 바람이 그쳤습니다."(14:32).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초기 에피소드에서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마저도 순종하는 이가 누구입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8:27).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의 반응이 매우 달랐습니다. "그러자 배에 있던 사람들이 와서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하며 그분께 경배했습니다."(14:33).

그들은 교훈을 잘 배웠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그들의 삶의 근원이자 중심이 되셔야 하며, 예배의 대상이 되셔야 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더 이상 "다윗의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1:1). 그분의 신성은 그분의 인성을 통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분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겐네사렛의 신앙


34. 그리고 건너가서 그들은 겐네사렛 땅에 들어왔다.

35. 그 곳 사람들은 그분을 알고, 온 시골로 나가서, 병든 모든 사람을 그분께로 데려왔다;

36. 그리고 그분께 간청하여 그분의 옷자락만 만지게 하였더니, 만진 자마다 구원을 받더라.


이 장이 끝날 무렵,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북서쪽 해안에 있는 도시 겐네사렛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라고 말씀하신 베드로의 흔들리는 믿음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대조적입니다.

"주여 주여"라고 말했던 베드로와 달리, 겐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고 병든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14:35). 그들은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병자가 낫는다는 것을 믿을 정도로 믿음이 강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믿음의 단순함과 위대함입니다. "만진 자마다 깨끗하게 나았다"(14:36).

이 에피소드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치유된 혈루증 여인에 관한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 9:20). 그 에피소드에 대한 해설에서 "그분의 옷자락"이라는 문구가 말씀의 가장 외적인 측면, 즉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나타낸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옷이 극심한 날씨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처럼 말씀의 진리는 영적인 해로부터 우리를 보호합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의복은 신성한 진리의 강력하고 보호하는 성질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에서 "주께서 옷을 입으시고 힘으로 띠를 띠셨나이다"라는 구절을 읽습니다(시편 93:1). 이것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의 능력을 말합니다. 8

말씀에 신성한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믿고 그 말씀을 우리 삶에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들어와 우리의 연약함을 치유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외적인 형태일지라도 말씀의 힘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면서 "말씀을 만지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만지도록 허용할 때, 우리는 겐네사렛 사람들처럼 "완전히 잘" 만들어집니다.

세례 요한의 참수 사건으로 시작되는 이 장은 겐네사렛 땅에서 "병든 모든 사람"이 치유되는 것으로 끝납니다(14:36). 헤롯의 파괴 시도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여전히 우세합니다. 세례 요한은 문자적 의미의 말씀이 지닌 치유의 진리를 대표하며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각주:

1. 이 사람은 로마 총독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헤롯 왕의 아들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헤롯 왕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했던 사람입니다( 마태 복음 2:2, 16). 역사가들에 따르면 헤로디아는 헤롯의 동생인 남편을 떠나 헤롯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첫 번째 결혼에서 딸을 데려 왔습니다.

2. 앞서 예수님께서 지치고 흩어진 무리를 보시고 "긍휼히 여김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실 때도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9:36)

3천국의 신비 3880[4]: “말씀에서 이중적인 표현이 흔히 나타나는데, 하나는 천상적인 것 또는 선한 것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 또는 참된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신성한 결혼이 말씀의 모든 개별 부분에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선과 진리의 결혼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참조 천국의 신비 590: “사람의 생각을 구성하는 모든 생각에는 이해에서 나온 것과 의지에서 나온 것, 즉 그의 생각에서 나온 것과 그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서에서는 모든 것에 대한 이중적 표현이 거의 모든 곳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는 영적인 것을 구현하고 다른 하나는 천상의 것을 구현합니다."

4. 스웨덴보그는 "기호"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대응"에 대해 말하는데, 실제로는 더 정확한 용어입니다. "대응"이란 지상의 모든 사물이 하늘의 모든 사물과 정확히 대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빵은 하늘의 사랑의 상징이 아니라 그 사랑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물은 그에 상응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에 상응합니다. 이 땅에서 물은 우리의 자연적인 갈증을 해소하고 육체를 깨끗하게 해줍니다. 천국에서는 진리가 우리의 영적 갈증을 해소하고 영혼을 깨끗하게 합니다. 스웨덴보그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문자적 의미는 세상에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구성되지만 영적 의미는 하늘에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구성되며, 하늘과 세상의 연결은 대응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씀은 아주 작은 점(이오타)까지도 모든 세부 사항이 대응하는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사실, 말씀은 순수한 대응을 통해 기록되었습니다."(천국과 지옥 114).

5참된 기독교 126: “유혹에 빠지면 사람이 혼자 남겨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가장 가까이 임재하시며 은밀하게 지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6. 스웨덴보그는 하나님을 믿고 계명을 지키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십계명의 계명에 따라 살기만 한다면, 종교가 무엇이든 태어난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주님의 신성한 섭리 253). 스웨덴보그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종교를 제공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오직 예수님에게만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 중 누구도 구세주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만 나아가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참된 기독교 107).

7참된 기독교 787: “사람은 자연적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결합은 생각에 존재해야하므로 사람의 애정이 있어야하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격으로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과의 결합은 눈의 시각과 한계를 알 수 없는 우주의 광활함이 결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또한 공중과 바다에 닿았다가 사라지는 바다 한가운데의 비전과도 같습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는 신과의 결합은 공중이나 바다에 있는 사람이 손을 펴고 팔로 초대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신과 사람의 모든 결합은 또한 사람과 신과의 상호 결합이어야하며, 가시적 인 신이 아니면 그러한 상호 결합이 불가능합니다."

8천국의 신비 9959: “진리는 악과 거짓으로부터 재화를 보호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며, 선이 가진 모든 힘은 진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경

 

Matthew 14:4

공부

       

4 For John said unto him, It is not lawful for thee to have 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