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보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섭리 #1

해당 구절 연구하기

  
/ 340  
  

1. 1장. 하나님의 섭리 (攝理)는 주의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의 정부 (政府)인 것

1. 무엇이 하나님의 섭리인가, 곧 주의 신성한 사랑 과 신성한 지혜에 의한 정부 (政府)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논문 중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지혜 (Divine Love and Wisdom )>에 대하여 전에 말하고 입증한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주님 (主)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지혜에 속하고, 신성한 지혜는 신성한 사랑에 속하는 것. (34-39)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는 이들로 지음을 입은 것 안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 (47-51)

우주 안의 모든 만물은 그것들로 지음을 입은 것. (52, 53, 151-156)

모든 것은 그 사랑과 그 지혜의 그릇인 것. (55-60)

주는 천사들 앞에 해님으로 보이며, 거기서 나오는 볕은 사랑이요, 빛은 지혜인 것. (83-88, 89-92, 93-98, 296-301)

주께로부터 나오는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는 하나를 이루는 것. (99-102)

여호와이신 영원부터 계신 주께서 우주와 그 안에 있는 갖가지 것을 스스로 창조하셨고, 무에서 창조하시지 아니한 것. (282-284, 290-295)

이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천사의 지혜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340  
  

주소 : 서울시 은평구 은평로 21길 31-12 (녹번동 75-21) 서울새교회 주문 : 02-389-1366 (교회) , 010-3687-1050 (양규대) 서적담당 : 010-5755-8765 (김승길) 인터넷 : www.newchurch.or.kr

스웨덴보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섭리 #243

해당 구절 연구하기

  
/ 340  
  

243. Ⅲ.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예배하고 이것을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해낸 하나님으로 인정하였으나 여호와는 바로 그 옆 시내 산에서 이것을 보시면서도 이것을 막으려 아니하신 것.

이것은 시내 산 가까운 사막에서 일어났었다. 여호와께서 그 가증한 예배를 드리지 않도록 억누르지 아니하신 것은 지금까지 설명하여온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법칙에 준한 것이요, 앞으로 나오는 것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악을 그대로 두신 것은 그들이 다 멸망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것은 주님의 교회를 표상할 수 있기 위한 것이었고, 또 애굽 사람들의 우상숭배가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먼저 뿌리 뽑지 아니하면 그들이 이것을 표상할 수 없었으며, 또 이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있는 것에 따라 움직이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으며, 이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엄한 형벌을 받아야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예배가 더 어떠한 것을 뜻하며, 또 그들이 전부 배척을 받고 모세가 세 나라를 일으키는 조짐은 무엇을 뜻하는가는 이것을 다룬 출애굽기 32에 관한 <천국의 신비 (Arcana Coelestia)>를 보시기 바랍니다.

  
/ 340  
  

주소 : 서울시 은평구 은평로 21길 31-12 (녹번동 75-21) 서울새교회 주문 : 02-389-1366 (교회) , 010-3687-1050 (양규대) 서적담당 : 010-5755-8765 (김승길) 인터넷 : www.newchurch.or.kr

스웨덴보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섭리 #338

해당 구절 연구하기

  
/ 340  
  

338. Ⅲ. 수단을 떠난 자비로 말미암아 순식간의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

[1]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작용 (作用, 役事)은 나면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일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고, 후에는 영원까지 이른다는 것과 이 작용은 순수한 자비에서 수단을 거쳐 끊임없이 진행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이로써 순식간의 구원이나 수단을 떠난 자비도 있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교회와 종교에 관한 문제를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수단을 떠난 자비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므로 구원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고 믿으며, 또 그러나 이것은 진리에 어긋나며 사악 (邪惡)한 신념이기 때문에 아래의 순서로 살필까 한다.

(1) 수단을 떠난 자비에서 나온 순식간의 구원의 신념은 인간의 자연적 상태에서 가정한 것.

(2) 이 신념은 자연적 상태와 전혀 다른 영적 상태의 무지에서 온 것.

(3) 기독교의 모든 교회의 교리는 내적으로 보면 수단을 떠난 자비에서 나온 순식간의 구원에서 상반 (相反)되나 그런데도 교회의 외적인 사람들은 이것을 지지 (支持)하는 것.

[2] (1) 수단을 떠난 자비에서 나온 순식간의 구원을 믿는 신념은 인간의 자연적 상태에서 가정한 것.

자연인은 그 상태에서는 하늘의 기쁨은 세상 기쁨과 같고, 똑같이 흐르며 받아들여지는 것밖에 모른다. 보기를 들면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어 가난에 쪼들린 가련한 상태를 벗어나 부유해져서 행복한 상태에 들어간 것 같고, 아니면 비천한 사람이 이름을 떨치게 되자 멸시에서 영광으로 가는 것 같거나, 아니면 초상집에서 혼인의 기쁨으로 가는 것 같은 줄로 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하루 사이에 바뀔 수도 있으며, 사후의 인간조건에 대한 그 밖의 다른 관념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신념의 근원은 수단을 떠난 자비에서 나온 순식간의 구원임이 분명하다.

[3] 더욱이 이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이 함께 한 회사 안에서 또한 시민적 공동체 안에 있을 수 있고, 그들끼리 서로 즐길 수 있으나, 마음은 다 다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 상태 안에서 일어난다.

왜 그런가? 내성은 아무리 달라도 이 사람의 외성은 저 사람의 외성에 친절을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적 상태에 비추어 또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구원은 단순히 천사들 있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요, 이 입국 (入國)은 수단을 떠난 자비로 된다고, 그래서 천국은 선한 사람에게 허락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인에게도 허락되며, 이들의 오감은 알찬 기쁨이라는 점만 다를 뿐 이 세상의 오감과 같다는 것도 믿게 된다.

[4] (2)이 신앙은 자연적 상태와는 전혀 다른 영적 상태임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

영적 상태 곧 사후의 인간의 상태는 위의 여러 곳에서 다룬 바 있다. 또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사랑인 것과 어떠한 사람도 사랑이 같지 아니하면 누구와도 살 수 없는 것과 혹 그러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 있는 곳에 가면 그 자신의 생명의 호흡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말한 바 있다.

이로써 모든 사람은 사후에 그 자신의 사회 곧 사랑이 같은 사람들 있는 곳에 오고, 그는 이들을 친척이나 친구처럼 알아본다. 또 신기한 것은 그가 그들을 만나 보면 그는 그들을 아주 어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처럼 본다. 영적 인척 및 영적 우정이 이러한 원인이 된다. 또 더 나아가서 어떠한 사람도 그 자신의 집 외에는 다른 집을 차지하지 못한다. 한 사회 안에 있는 사람마다 각기 자기 집이 있으며, 그가 그 사회에 들어가면 즉시 그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는 이 집을 발견한다. 그의 집 밖에서 그는 다른 사람과 친교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집 밖에서는 아무데도 유할 수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남의 방 안에서 지정된 자리 외에는 유할 수 없다. 만일 다른 곳에 앉으면 그는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같이 되고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사람이 한 방에 들어가면 자기 앉을 자리를 아는 이것이다.

[5] 이 모두는 영적 상태는 자연적 상태와 전혀 다른 것과 어떠한 사람도 그의 주동이 되는 사랑이 있는 곳이 아니면 아무데나 있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의 기쁨은 그곳에 있기 때문이요 또 모든 사람은 그의 생명의 기쁨 안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영은 그 밖의 다른 곳에 있을 수 없음은 그 기쁨이 그의 생명을 이루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마음에도 없는 것을 겉으로는 얼굴에, 말씨에, 몸짓과 그 밖의 기쁨에 있는 척 보이도록 철두철미하게 배운다. 그래서 자연계의 인간상태로는 그의 상태가 사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사후상태는 영적 상태 곧 그 자신의 사랑의 기쁨 안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도 있을 수 없고, 그 기쁨은 자연계에서 그의 생명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6] 이 모든 것은 지옥의 기쁨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어떠한 사람도, 흔히 천국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천국의 기쁨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다른 말로하면 악의 기쁨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선의 기쁨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안다.

또 이것은 그 어떠한 사람도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못하게 하지 않으며, 길이 그에게 보이며, 기회가 있으면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천국에 들어가 천국의 즐거움을 숨 쉬면, 그 즉시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심장의 고통에 시달리며, 마치 기절한 것같이 느껴지고, 그 상황에서는 불 가까이에 끌려온 뱀처럼 비비꼬며, 얼굴은 천국을 외면하고 지옥을 항하여 거꾸로 곤두박질하며 달아나며, 자기 자신의 사랑에 속한 사회에 들어가기까지 이 짓을 쉬지 않는 것으로 더욱 분명히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도 수단을 떠나 자비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 많은 사람이 상상하듯 단순히 입국하게 되는 것은 아무런 덕이 되지 못하며, 또 순식간의 구원 같은 것도 없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수단을 떠난 자비를 예상하기 때문이다.

[7]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수단을 떠난 자비로 즉석에서 구원 얻는 것을 믿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인이 되자 그들의 지옥적인 기쁨 또는 악에 물든 그들의 기쁨이 신성한 전능으로 또는 하나님의 자비로 하늘의 기쁨 또는 선 안에 있는 기쁨으로 바뀌기를 원했다. 또 그들은 이것을 억척스럽게 원했기 때문에 천사들은 이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천사들이 그들의 지옥적 기쁨을 거두어가자마자,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생명의 사랑에 속한 기쁨 곧 그들의 생명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감각과 모든 운동을 박탈당하고 죽은 듯 쓰러지고, 그들의 것이 아닌 다른 생명을 숨 쉴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과 몸에 속한 모든 것이 뒤로 비틀어지고 정상으로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생명의 사랑의 기쁨을 받게 함으로써 다시 깨어났던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그들은 말하기를 그들은 내적으로 무엇인가 두렵고 떨리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올빼미를 점 있는 비둘기로 바꾸는 것이, 아니면 뱀을 어린양으로 바꾸는 것이 지옥적인 영인을 천국의 천사로 바꾸는 것보다 더 쉽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8] (3) 기독교의 모든 교회의 교리는 내적으로 보면 수단을 떠난 자비에서 나온 순식간의 구원에서 상반 (相反)되나 그런데도 교회의 외적인 사람들은 이것을 지지 (支持)하는 것.

모든 교회의 교리는 내적으로 보면 생명을 가르친다. 사람은 자기를 검토해야 하며, 그의 죄를 보고 시인해야 하며, 그것을 고백하고 회개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생활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교리의 교회가 어디 있을까? 이 권고 및 교육이 없는 성찬에 누가 참여하는가 알아보시라.

그러면 확신하게 되리니, 십계명에 근거하지 않는 그리고 십계명은 생활에 관한 계명이 아닌 교리의 교회가 어디에 있을까? 착하게 살면 구원을 얻고 악하게 살면 저주를 받는 것을 듣자마자 시인하지 않는 교회의 교인이 있을까?

그래서 온 기독교가 받아들인 교리의 Athanasians 신조에 일렀으되,

"주는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때에 선을 행한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고, 악을 행한 사람은 영원한 불에 들어가리라."

[9] 이것은 모든 교회의 교리는 내적으로 보면 생활을 가르치며, 생활을 가르치기 때문에 구원은 생활여하에 있는 것을 가르치며, 또 인간의 생명은 순식간에 불어넣어 지는 것이 아니며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또 악을 죄로 알고 끊음으로써 형성되고, 그러므로 무엇이 죄인가를 배우며, 그것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그것을 뜻하지 않음으로써, 그러므로 그것을 그만둠으로써, 또 하나님에 관한 수단의 지식을 얻음으로써 형성되는 것을 입증한다.

인간의 생명은 이러한 것으로 형성되고 다시 나게 되며, 일시에 그에게 주입시킬 수 없는 것이다. 자체에 있어서 지옥적인 유전악이 옮겨지고, 그 대신 자체에 있어서 천국적인 선이 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유전적 악에 비추어보면 사람은 이해성에 있어서는 올빼미와 같고 의지에 있어서는 뱀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다시 나면 이해성에 있어서는 비둘기 같고, 의지에 있어서는 양과 같을 수 있다. 그러므로 순식간에 재생과 구원은 올빼미를 비둘기로, 그리고 뱀을 양으로 일시에 돌이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간생명에 관한 어떠한 지식이 있는 그 어떤 사람이 이것을 불가능함을 모르랴. 올빼미나 뱀의 성격을 옮겨 놓고 그 대신 비둘기와 양의 성격을 심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10] 총명한 사람은 누구나 더 총명하게 되며, 지혜 있는 사람은 누구나 더 지혜 있게 되는 것과 또 총명과 지혜는 사람 안에서 자랄 수 있으나, 어떠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려서부터 일생을 마칠 때까지 자라는 것과 이리하여 사람은 끊임없이 완벽해지는 것도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영적 총명과 지혜에 있어서는 더욱 해당되지 않을까. 이것은 자연적 총명과 지혜보다 두 등차나 위로 오르며, 위로 오르면 말로 할 수 없는 천사의 총명과 지혜가 된다. 천사에게 있어서는 이것들이 영원히 더해간다는 것을 위 (335)에서 말한 바 있다. 영원히 완성해가는 것을 순식간에 완성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임을 뜻하려는 이것을 누가 이해하지 못하랴.

  
/ 340  
  

주소 : 서울시 은평구 은평로 21길 31-12 (녹번동 75-21) 서울새교회 주문 : 02-389-1366 (교회) , 010-3687-1050 (양규대) 서적담당 : 010-5755-8765 (김승길) 인터넷 : www.newchurch.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