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큰 아이디어

작가: New Christian Bible Study Staff (기계 번역 한국어)

A girl gazes into a lighted globe, showing the solar system.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가 거대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지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아이디어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우리 인간 사회는 이러한 아이디어들을 지워버리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바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새로운 기독교 성경 공부 사이트에서는 이러한 추세를 거스르려고 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틀을 제공하는 큰 아이디어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다음은 새로운 기독교 관점에서 바라본 큰 아이디어 목록의 시작입니다. 각 아이디어마다 스웨덴보그의 신학 저서에서 참고할 수 있는 몇 가지 참고 문헌을 나열한 각주가 있습니다:

1. 신은 존재한다. 영적, 육체적 모든 차원에서 온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은 단 한 분뿐입니다. 1

2.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2

3. 하나님의 본질은 창조물 안에서, 그리고 창조물을 통해 존재합니다. 3

4. 우리의 육체적 감각이나 센서로는 감지할 수 없는 영적인 것부터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대부분의 인식을 하는 물리적 우주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창조의 수준 또는 정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4

5. 창조된 우주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지만, 중요한 면에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신은 자유가 존재할 수 있도록 분리되기를 원하십니다. 5

6. 하나님은 사랑에서 지혜, 즉 선한 일을 기꺼이 행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지혜를 통해 일하십니다. 6

7. 물리적 수준의 창조는 인간에게 신을 인정하고 협력할지 여부를 이성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7

8. 하나님은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8

9.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기적이지 않을 때, 이웃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둔 주님에 대한 사랑에 진정으로 동기를 부여할 때만 진정한 행복이 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인도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따르도록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9

10.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알려주시고, 우리 마음속에 흘러들어와 우리를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롭게 그분의 인도를 거부하고 대신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관대함의 습관이나 이기심의 습관을 만들고 그 습관에 따라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습관이 진정한 '우리'가 되고, 우리의 지배적인 사랑이 됩니다. 10

11. 우리의 육체는 결국 죽지만 마음의 영적인 부분은 계속 유지됩니다. 이미 영적인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의 인식이 변화하여 영적인 현실을 완전히 인식하게 됩니다. 11

각주:

스웨덴보그의 저서에서

 

참된 기독교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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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 이들에 관련된 내용을 더할까 한다.

첫째,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섯 개의 학회들을 보았는데, 각자는 서로 다른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첫째는 불타는 빛으로, 둘째는 노랑 빛으로, 셋째는 밝은 흰빛으로, 넷째는 밤과 저녁 사이의 중간 빛으로, 다섯째는 저녁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있었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았다. 길 위에는 어떤 이는 말을 타고, 어떤 이는 마차 안에, 어떤 이는 걷고 있었으며, 어떤 이는 불타는 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첫 번째 학원으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내가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을 때, 그곳으로 가서 어떤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가를 듣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 났고, 그래서 곧장 준비하여 첫 번째 학회를 향하여 빠르게 달리고 있는 무리들과 합류하여 그들과 함께 들어갔다. 그리고 보니, 그 곳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는데, 벽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기 위해 일부는 좌우로 움직였다. 앞에는 낮은 강단이 있었고, 사회자가 서 있었는데, 손에는 지팡이가 있었고, 머리에는 모자를 썼으며, 학원의 불타는 빛으로 물든 웃을 입고 있었다.

회중의 무리가 다 모였을 때, 사회자는 큰 소리로 말했다.

"형제 들이여, 오늘 토론의 주재는 인정 무엇인가? 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인정의 본질은 영적이고, 실행은 자연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지혜로운 자로 평판이 나있는 자들이 앉아있는 왼편 의자의 첫줄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말했다.

"내 의견은 인정은 신앙에 의해 감 동된 도덕성이라는 것이요. 인정은 마치 여종이 주인에게 시중을 들듯이, 신앙을 따른 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소. 신앙이 있는 자는 율법에 따라 행하며, 인정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는 생활에 따라 율법과 인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그가 이를 알고 행하였으며, 동시에 그렇게 행하였기 때문에 구원된다고 생각하였다면, 그는 그의 자아로 거룩한 신앙을 모독하고, 그 효력을 손상시켰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관련되어 있는 자들의 교리에 따른 것 아닌가요?"

그리고 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중에는 수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동의한다고 표시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마다 어릴 때 가르침을 받은 도덕성이 아니고 자발적인 인정이 무엇이겠소? 그러므로 그 자체는 자연적이지만 믿음으로 영감을 받을 때, 영적이 됩니다. 어느 누가 사람들의 도덕적인 삶으로 그들에게 신앙이 있는지, 또는 신앙이 없이 행하였는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신앙을 주시고 인 치시는 하나님만이 신앙이 있는 자를 아 시고 분별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인정이 신앙에 의해 도덕적으로 영향을 받는 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리고 도덕성이 그 저변에 있는 신앙에 기인하는 것은 구원을 받지만, 그 외에 다른 대로부터 있다면 구원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공로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정과 신앙을 혼합하는 자들, 즉 이들을 외적으로 연결시키는 대신, 내적으로 합치는 자들은 헛수고를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뒤에 서있는 하인을 감독과 같이 마차에 태우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오른편 첫 번째 의자에 앉은 자가 일어나 말하길, "내 의견은 인애란 슬픔으로 가득찬 동정심이란 것입니다. 그 까닭은 겸손한 마음의 동정심 이상으로 하나님을 달래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동정심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신앙과 인정을 주시기를 구하고, 주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마태복음 7:7)’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리하여 믿음과 인정이 주어졌고, 이 안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진실된 동정심이 슬프고 마음을 애통하게 하기 때문에 동정심이 인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동정심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이것은 불쌍함이 아닌가요? 이 느낌은 사실 기도 후에는 사라지지만, 후에 다시 기도할 때 동정심과 인정을 가져다줍니다. 우리 사제들은 구원을 신앙에 귀속시키고, 인정은 귀속시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신앙과 인정을 애원하며 기도하는 동정심 이외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말씀을 읽을 때, 나는 신앙과 인정을 모두 구원의 방편이라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직자들과 상담을 할 때, 신앙이 유일한 구원이고, 인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때 내가 느낀 것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두 큰 바위 사이에서 배가 파선할까 두려워서 작은 배로 도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 작은 배는 동정심입니다. 더구나 동정 심은 모든 면으로 유익합니다."

이 후에 오른쪽 둘째 의자에서 다른 사람이 일어나 말하길, "인정은 그가 선하건 악하건 모두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이 내 의견입니다. 나는 이런 방법으로 확신하는데, 인정은 마음속의 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리고 선한 마음이란 무든 사람 즉 선한 사람에게와 마찬가 지로 악한 사람에게도 좋은 것을 기원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원수들에게 까지도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거두어들이면, 그 편에선 무익하게 된 인정이 아니며, 마치 한발로 깡충거리는 사람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악한 자들도 선한 자들과 같은 사람들이며, 인정은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가 사악한 자라 할지라도 내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인정은 모든 동물들 즉 부드러운 양들과 마찬가지로 흉악한 이리들에게 생기를 주며, 유용한 포도와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가시나무에도 생기를 주는 태양의 마음을 가진 자들과 같습니다."

그는 포도 알을 집어 들면서, "인정은 이 포도와 같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이것을터뜨리면 속이터져 나옵니다." 그리고는 그가 포도를터뜨리자 속이 드러났다.

이 말이 있은 후에, 왼쪽 둘째 의자에서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말했다.

"내 의견은 인정은 자기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온 마음을 다하여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정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정은 자기 자신으로 시작해서 먼저 가장 가까운 형제들과 자매들 그리고 친척들과 관련자들에게로 자신과의 거리에 따라서 전진해 나갑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 범위를 벗어난 이방인이고, 이방인들은 속사람에게서 먼 거리에 있는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본성은 혈통과 출생에 의하여 관계되는 자들을 결합시키고, 또 제 이의 본성인 관습은 친구들을 결합시킵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역시 이웃이 됩니다. 친구들과 친척들은 내적인 인연과 외적인 인연에 의하여 인정이 결합하지만, 내적으로 결합되지 않은 자들은 단지 동료라고만 합니다. 모든 새들은 자신들의 동족을 깃털이 아닌 울음소리로 알아보며, 그들이 서로 가까이 있을 때 에는 그들의 몸에서 나는 생생한 영기에 의해서 가까워집니다. 새들에게 있는 동족에 대한 애정과 결합은 본능이라고 하며, 사람에게도 이러한 본능이 있어서 자신의 가족과 같은 동족들을 위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참된 본능입니다. 우리가 말하듯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마음 또한 영으로써 냄새를 맡는 것처럼 동족을 알아봅니다. 이 동질성과 동정심 안에 인정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이질감을 주는 반대의 이질성은 혈연이 아니며, 인정도 없습니다. 그리고 습관이 제 이의 본성이고, 동질성을 만드는 것처럼 친구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에 인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낱 설은 언어와 습관을 가진 외국 항구에 내린 사람은 자기의 것과 같은 것이 없음으로, 그 나라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 나라에 도착하게 되면, 친숙한 언어와 습관에 자기 세상에 온 것 같아서 인정의 기쁨인 사랑의 기쁨을 느낍니다."

오른쪽 세 번째 의자에 한 사람이 일어나 큰 소리로 말하길, "인정은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풀고, 궁핍한 자를 돕는 것이라는 것이 내 의견입니다. 이것이 확실한 인애입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에 대해서 모순이 있을 수 없는 성경 말씀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잘사는 자에게 준다는 것은 인정이 들어 있지 않는 과시일 뿐이며, 오직 반대급부에 대한 기대만 있을 뿐이고, 이 속엔 이웃 사랑의 참된 애정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천국에는 없고, 이 세상에서만 유용한 거짓 애정만 있을 뿐입니다. 도움을 받아야할 사람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입니다. 그들을 돕는 데는 보상의 관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았던 도시에선 누가 덕스러운 사람이고 누가 부덕한 사람인가를 잘 알고 있으며, 덕스러운 사람들은 길가에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곧 걸음을 멈추고 도움을 주 었으며, 반면에 부덕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본체만체 자나가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덕스러운 사람은 인정이 있고, 부덕한 사람은 인정이 없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주고 궁핍한 사람을 돕는 것은 마치 굶주리고 목마른 양떼를 목장과 시내가로 인도하는 목자와 같으며, 부자와 풍족한 자에게 주는 자는 신성한 능력을 누리는 자들을 돌보며, 배부른 자들에게 고기를 주고 술 취한 자들에게 술을 강권하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 사람 뒤에 왼쪽 세 번째 의자에서 또 다른 사람이 일어서서 말하길, "인애란 병원, 진료소, 고아원, 보육원 등을 짓고, 기부금으로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라는 것이 내 의견입니다. 그 이유는 공공복리가 사사로운 복지보다 훨씬 앞서있기 때문이며, 그렇게 함으로 인정은 더욱 풍부해 지고, 선들도 충만해지며, 무수히 다양해집니다. 따라서 말씀의 약속으로 바라는 보상이 더욱 풍성해 집니다. 사람은 땅을 파고 씨를 뿌리는 만큼 거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에게 주고 궁핍한 자를 돕는 최고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누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며, 혜 택 받은 자들로부터 겸손한 감사와 칭송을 듣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마음을 높이고, 인정이라는 애정을 가장 높은 위치에까지 올리지 않겠습니까? 걸어 다니지 않고 차를 타고 다니는 부자는 담벼락에 가려서 길거리의 거지들을 볼 수 없으며, 돈을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도보다 큰 규모로 그들의 자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같이 부자가 되지 못하여서 비록 차를 타지 못하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또 다른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같은 줄에 앉아 이 말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아주 큰 소리로 앞서의 연사를 압도하며 말하길, "부자로 하여금 가나한 사람이 남에게 주는 것보다 그 부자의 인정이 후하고 우수하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오. 왜냐하면 그가 행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의 위엄에 맞게 행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왕이나 장관, 지휘관, 수행원 등등 모두는 자신의 위치에 따른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체에 있어 인정은 증여자의 계급이나 증여물의 가치에 따라서 평가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며, 그 증여가 행해지는 애정의 충만함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전 한 닢을 주는 하인이 사회적 저명인사가 주는 어떤 인애보다도 더 큰 인정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 말씀과도 일치됩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하는 것을 보았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도다.' (누가복음 21:1-3)"

이 후에 왼쪽 네 번째 의자에서 다른 사람이 일어나 말하길, "내 의견으로는 인정은 성전을 기부하고 성직자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을 행하는 자는 그 마음을 거룩한 것에로 돌리고 있으며, 이일로 그의 행위는 거룩해지는 것으로 확신합니다. 인정은 그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에 자연히 이것을 요구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예배는 거룩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선,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20)고 하셨기 때문이며, 주님의 종인 사제들은 그 예배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는 성직자와 교회에 바치는 예물은 어느 누구의 것보다, 그리고 어떤 목적의 것보다 월등히 우월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밖에도 성직자들에겐 그 예물을 축복할 능력이 주어지며, 그것으로 그는 예물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물을 거룩하게 보는 것보다 더 마음을 넓혀주고 참된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오른쪽 네 번째 의자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서 말했다.

"인정은 옛날 기독교적 형제애라는 것이 내 의견입니다. 참 하나님을 예배 하는 교회마다 옛 기독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인정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으로 확신합니다. 인정은 마음을 결합하고, 많은 사람을 하나로 만들며, 그에 따른 것들을 초대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을 형제 즉 그들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워하든 야만족들에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 소유의 공동체를 만들 었으며, 그 안에서 뭉치고 한 마음임을 기뻐하였고, 그들의 모임에서는 매일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며, 만찬 때는 인정에 관한 대화가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형제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지나고 분열이 일어난 후에는 마침내 아리안파와 같은 가증한 이단설이 나왔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의 인성에 속한 신성에 관한 관념을 빼앗아 버렸으며, 따라서 인정은 소멸되었고, 형제애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진리로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이 형제이며 (마태복음 23:8), 그들이 영적으로 형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엔 사람의 영으로써 본성이 알려지지 않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서로 형제라고 부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믿음만의 형제와 주 하나님 구주 이외에 다른 하나님의 신앙에 속한 것이 없으면 형제애가 없음은 형제를 이루는 인정이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기독교 형제애가 인정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는 있을 것으로 예언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한줄기 불빛이 동쪽 창문을 통해서 나타났고, 그의 뺨에 물들었으므로, 모인 자들이 아주 놀라워하였다.

마지막으로 왼쪽 다섯 번째 줄에 앉았던 사람이 일어나 방금 말한 사람의 의견에 무엇인가를 첨가하기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락되자 그가 말하길, "내 의견은 인정은 그와 관계된 모든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나는 이 의견을 성찬 때 습관적으로 하는 말에서 얻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자기 친구들에게 ‘내가 잘못한 것을 용서해 주시요.’라고 하고, 그들이 인정의 모든 의무를 이행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인정에 속한 꾸며진 그림이며, 진실된 인정의 형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 말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고 또 인정에 도달하고자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께서 ‘아버지시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가르쳐주신 주님의 말씀에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죄는 위궤양 같아서 복부를 절개하여 고치지 않으면, 주위에 있는 조직들을 침범하는 것과 같으며, 뱀같이 기어 다니는 것들이 전신에 있는 피를 불결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웃에게 지은 죄도 이와 같습니다. 회개에 의해 제거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살지 않으면, 계속 부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 없이 다만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마치 한 사람이 전염병에 걸려 있으면서 장관에게 가서 ‘각하 나를 고쳐 주시요.’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고쳐줄 수 있겠소?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하고, 의사의 처방에 따라 조제된 약을 먹으시요. 그래야 고쳐질 것이요’라고. 주님께서는 실제로 회개하지 않고, 죄의 용서를 비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펴서 이사야서에서 기록된 말을 읽으라.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히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을 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라.' (이사야 1:4, 15-18) 이때에 죄들이 사하여지고 멀리 옮겨질 것입니다."

이 모든 말들이 끝난 후에, 내가 손을 들고 내 의견을 말해도 좋은지를 묻자, 사회자는 받아드렸고, 승낙이 떨어지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의견은 인정은 모든 일과 업무 속에서 공의와 공평의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구주이신 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사랑에 의해서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의견들은 인정에 관한 뛰어난 예들 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 모임의 사회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정은 근원에 있어선 영적이고, 각 분야로 들어가 행할 땐 자연적입니다. 그리고 자연적 인정은 만약 내면적으로 영적인 것이 있을 땐, 천사들에게 다 이아몬드처럼 투명하게 나타나지만, 내면적으로 영적인 것이 없고 순수한 자연적인 것만 있을 땐, 요리된 물고기의 눈처럼 혼탁해진 진주처럼 천사들에게 나타납니다. 나는 당신들이 순서대로 표현한 인정에 관한 탁월한 예들이 영적인 인정에 속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무엇이고, 그들 속에 있어야할 것이 무엇이며, 이들이 인정에 속한 자연적인 형상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 따른 영적인 것 자체는 공평과 공의의 사랑으로 행하여진 것들이며, 말하자면, 인정의 행위 속에서 사람은 공평으로 행한 것인지, 공의로 행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위로 악을 행할 수 있으며, 악한 행위와 같이 보이는 것으로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돈이 궁한 강도에게 칼을 사기 위한 돈을 주는 자는 자신에 의해 악을 행하는 자입니다. 비록 강도가 구걸할 때,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입니다. 또한 만약에 강도를 풀어주고, 숲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며, 혼자 말하길, ‘그가 강도짓을 해도 내 잘못은 아니야, 나는 다만 그에게 돈을 주었을 뿐이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지요. 게으른 자를 먹여주고, 일을 하지 않도록 하며, 말하길, ‘내 집으로 가서 자시오. 왜 피곤해 지쳐있는 것이요?’라고 하면, 그는 게으름 피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또한, 부정한 성향을 가진 친척이나 친구를 승진시키면, 그들은 업무를 수행하면서 각종 못된 짓으로 음모를 꾸밀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러한 인정에 속한 일들이 공의와 공평에 속한 사랑으로 한 것이라는 것을 보지 못할 자가 있겠습니까? 또 다른 면에서, 사람은 악한 행위처럼 보이는 것으로 선을 행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판사가 범인이 눈물을 흘리며, 동정을 구하고, 그의 이웃이기 때문에 그를 용서해 줄 것을 간구하였기 때문에 사면을 하였을 때, 판사는 법에 따라 형벌을 집행하는 것이 인정에 속한 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더 높은 등차의 이웃인 사회에 해를 끼치고, 더한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것이며, 불의한 재판의 치욕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인이 잘못하였을 때, 주인에 의해 교정되고, 아이들이 나쁜 행위를 하였을 때, 야단을 침으로 바로 잡아질 때, 인정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악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있는 지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악을 행할 때, 감옥에 가두고 벌을 받게 하는 것은 주께서 교회를 목적으로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공의 자체이시고, 주께서 행하신 것은 무엇이든 공평 자체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로써 앞서 말했던 것처럼 영적인 인정은 공평과 공의의 사랑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며, 이는 구주이신 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에 의해서만 행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정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며, 주께서 ‘내 안에 있는 자는 나도 그 안에 있을 것이요, 많은 결실을 맺을 것이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라고 하셨으며,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이 있고 (마태복음 28:18), 공평과 공의에 속한 모든 사랑은 공의 자체이신 천국의 하나님으로부터만 있으며, 그분으로부터 사람은 모든 공평을 (예레미야 23:5, 33:15) 얻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인정에 관하여 말했던 모든 결론이 나온 것 입니다. 즉 믿음으로 영감을 받은 도덕성, 동정심에 영향을 받는 경건, 도덕적인 자와 부도덕적인 자에게 같은 선을 행하는 것,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친척과 친구에 봉사하는 것, 가난한 자에게 주고 궁핍한 자를 돕는 것, 병원을 짓고 사회적으로 기부하는 것, 성전을 기부하고 성직자에게 선을 행하는 것, 옛 기독교도들의 형제애, 자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이 공평과 공의의 사랑으로 행하여 졌을 때, 인정에 속한 뛰어난 예들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정은 없으며, 다만 샘에서 분리된 개천과 나무에서 찢어진 가지와 같을 뿐입니다. 참된 인정은 주께 대한 신앙이며, 모든 일과 업무를 공정하고 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공의를 사랑하고, 공평으로 행하는 자가 그 속에 형상과 모양이 있는 인애입니다."

이 모든 말이 끝난 후 침묵이 흘렀고, 그들의 속사람으로는 어떤 것 이 참인지를 알고 시인하는 것 같았으나, 겉사람으로는 그렇지 않았음을 그들의 얼굴로 관찰하였다. 이 때 갑자기 나는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 났다. 내가 영으로부터 다시 육체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사람은 육체를 입었기 때문에, 어떤 영인에게도 나타날 수 없으며, 영인들과 천사들도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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