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풀이 #0

작가: 엠마누엘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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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calypse Revealed, by Emanuel Swedenborg. Originally published in Latin at Amsterdam, 1766, entitled "Apocalypsys Revelata".

無等山麓 一隅에서 옮긴이 정인보,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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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계시록을 우리말 판으로 세상에 선보이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 책의 속뜻을 오래 전에 이미 당신의 종 Emanuel Swedenborg에게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이 책 출판비를 전담해 주신 Swedenborg Foundation에 감사를 드립니다.

말세에 처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 책의 비중이 가볍지 않을 것을 굳게 믿고 삼가 영원히 내 것 삼아 주시기만을 식구들과 더불어 두 손 모아 비는 바이다.

정인보, 197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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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목차

[머리말]

[로마 가톨릭과 그 종교 교리의 요약]

[개혁교회와 그 종교 교리의 요약]

요한계시록 1장: 1-67

요한계시록 2장: 68-153

요한계시록 3장: 154-224

요한계시록 4장: 225-255

요한계시록 5장: 256-294

요한계시록 6장: 295-341

요한계시록 7장: 342-386

요한계시록 8장: 387-417

요한계시록 9장: 419-463

요한계시록 10장: 464-484

요한계시록 11장: 485-531

요한계시록 12장: 532-566

요한계시록 13장: 567-611

요한계시록 14장: 612-655

요한계시록 15장: 656-675

요한계시록 16장: 676-716

요한계시록 17장: 717-752

요한계시록 18장: 753-802

요한계시록 19장: 803-839

요한계시록 20장: 840-875

요한계시록 21장: 876-926

요한계시록 22장: 932-962

[머 리 말]

계시록을 설명하려고 애쓴 사람이 많다. 그러나 말씀의 영적 의미를 지금까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그 속에 감추어 있는 깊은 뜻을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영적 의미만이 이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주석하는 사람은 열 가지 것을 추측하고, 그 대부분을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뒤섞어가면서 여러 나라 상태에 대한 것에 적용하였었다. 그러나 계시록은 모든 말씀과 같이 그 영적 의미로 보면 이 세상에 속한 것은 하나도 없고, 하늘에 속한 것만 다루고 있다. 그래서 제국이나 왕국을 다루지 않고 천국과 교회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하나 알아둘 것이 있다. 1758년 런던판 소저 <최후 심판>에 기록된 것 같이, 그것은 1757년 영계에서 일어난 최후 심판 이후에 기독교인들로 새 하늘을 이룩한 이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주께서 마태복음 28:18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님이 천상천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악행을 회개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천국으로부터 땅 위에 새교회 곧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고, 또 앞으로도 계속 내려올 것이다. 이 교회가 주님만을 시인하리라는 것은 계시록에 있는 아래의 구절로 분명하다.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이니"(요한계시록 21:9-10)

"또 다른 곳에는,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 되었으니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요한계시록 19:7, 9)

새 하늘이 있는 것과 땅 위에는 새교회가 거기서 내려올 것은 이 말씀으로 분명하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진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요한계시록 21:1-2, 5)

새 하늘은 기독교인들로 구성한 새 천국을, 새 예루살렘은 땅 위의 새교회를 뜻한다. 이 교회는 새 하늘과 더불어 하나로 움직일 것이다.

어린 양은 신성한 인성으로서의 주님을 뜻한다. 이에 대하여 몇 가지 것을 더 설명할까 한다.

기독교 천국은 고대 천국 밑에 있다. 주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주의 때부터 세 분 인격으로 있는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세 분 하나님들이라는 관념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들이 들어간다. 이것은 기독교 전체가 삼위일체의 신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 신성을 어떤 인간의 인성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께서 유일무이한 하나님이시오, 그 안에 삼위가 있으시다는 새 예루살렘의 신앙을 받을 수 없다. 이 까닭에 이 사람들은 따로 분리되어 막다른 곳에 보냄을 입는다.

나는 허락하심을 입고 그분리되고 옮겨진 것을 최후 심판 후에 본 바 있다. 왜냐하면, 온 천국은 올바른 신관 위에 세워지며, 땅 위의 온 교회와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도 그 올바른 신관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 신관으로 결합이 있으며, 그 결합으로 말미암아 빛과 지혜와 영원한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주 이외에 다른 어떠한 사람도 계시록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말끝마다 특별히 밝은 빛 곧 계시가 없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기꺼이 나의 영의 눈을 여시어 나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안에 있는 어떠한 것도 나 자신에게서나 어떠한 천사에게서 나온 것으로 믿지 마시고, 오직 주님에서만 나온 것을 믿어 주시기 바란다. 주님도 천사를 거쳐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도 하였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요한계시록 22:10)

이것은 예언의 말씀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을 뜻한 것이다.

[로마 가톨릭 및 개혁 교회와 그 종교 교리의 요약]

요한계시록 17; 18; 19에는 로마 가톨릭 종교인 바빌론도 다루어져 있기 때문에 설명의 서두에 그 교리적 신조를 아래의 순서대로 밝히려고 한다.

(1) 영세, (2) 성체성사 또는 성찬식, (3) 미사, (4) 고해, (5) 칭의(称義), (6) 연옥(煉獄), (7) 일곱 가지 성사, (8) 성도, (9) 권능들에 대하여

(1) 영세(세례)에 대하여

그들은 아담은 죄를 범한 후 영육 간에 아주 더 악하게 변해 버렸다고 가르친다. 이 죄는 모든 인류 속으로 스며들어 갔으며. 이 원죄는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제거된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고해 성사에 의해서 적용된다고 하며, 정욕은 영세(세례)를 받아도 죄를 자극하는 것으로 남으나 죄 자체는 아니라고 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를 입고 새 사람이 되며, 충분하고도 완전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한다. 영세를 중생과 신앙의 세수 대야라 일컫는다. 영세를 받은 사람은 자라서 그들의 후견인들이 서약한 서약들을 다짐하게 한다. 이것이 견진성사(堅振聖事)이다. 영세 후의 실수 때문에 고해성사(회개)가 필요하다는 것들이다.

(2) 성체성사(聖體聖事) 또는 성찬식에 대하여

의식을 드린 즉시 예수그리스도의 참 몸과 참 피는 그의 영혼과 성신과 더불어 실제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떡과 술 안에 포함된다. 말의 힘으로 말미암아 몸은 떡의 형태 안에, 피는 술의 형태 안에 포함되나. 자연적 연결과 혈연의 힘으로 말미암아서는 곧 그에 의해서 주 그리스도의 부분 부분이 다 같이 결합되고, 또 그 몸과 그 영혼과 더불어 그 놀라운 본질적 결합으로 인해서 신성도 다함께 결합된 그 힘으로 말미암아 몸 자체는 술 안에, 피는 떡 안에, 그리고 영혼은 그 두 가지 형태 안에 포함된다고 한다. 이 까닭에 그들(몸과 피와 영혼과 성신)은 두 가지 형태 안에 있는 바와 꼭 같이 한 형태 안에도 가득히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모든 것과 전체가 술과 그 각 부분 안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을 나누어 떡은 평신도에게, 술은 성직자에게 준다. 술잔에는 물이 술과 더불어 섞이어 있다. 그리고 평신도들은 성직자로부터 성찬을 받아야 하고, 성직자는 자신들로부터 받아야한다. 그리스도의 참 몸과 참 피는 예식을 올린 후에는 성별(聖別)한 각 부분 안에 있는 집전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집전자가 나타나 보이거나 오갈 때는 경배하여야 한다. 떡의 모든 물체가 몸으로, 술의 모든 물체가 피로 화하는 이 놀랍고도 특수적인 변화는 화체(化體)라 일컫는다. 두 가지 형태의 성찬은 일정한 규정 안에서 교황이 집전할 수도 있다. 그것은 초자연적 떡이요, 천사들의 떡이다. 이것은 너울을 쓰지 않고 먹어야 한다. 이것을 영적 양식이라고도 하며, 사람이 죄에서 자유하게 되는 해독제라고도 한다.

(3) 미사에 대하여

이것은 희생의 미사라고도 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당신 자신을 드린 희생의 떡과 술의 형태로 표상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미사는 진정한 속죄와 순결의 희생이요, 그 안에는 신성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희생이다. 만일 백성들이 성사(聖事)를 중요시하여 사귀지 아니하고 다만 성직자만 중요시하게 되면 그때 백성들은 영적으로 사귀는 것이다. 성직자들은 그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진실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성사를 행하기 때문이다. 미사는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그 나라 말로 집행해서는 안 된다. 미사는 신실한 백성들이 크게 배워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직자는 주의 날에 이에 대하여 어떠한 조치를 해야 할 것이다. 신비한 어떠한 것은 낮은 목소리로, 그밖의 것은 높은 목소리로 발음토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린 그 큰 희생에 존엄성이 있게 하기 위하여 빛과 분향과 옷과 그밖의 것이 있어야 한다. 미사는 죄와 벌과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과 또 죽은 자를 위해서 드려야 한다. 성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미사는 탄원을 받으면 중재(仲裁)를 하므로 감사 의식이다.

(4) 고해(회개)에 대하여

영세(세례) 이외에 고해성사가 있다. 이것으로 죽은 자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가 영세 후에 실수한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래서 일종의 고뇌(苦惱)의 영세라고도 한다. 고해의 성분은 회한(悔恨), 고백 및 속죄이다. 회한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령의 맥박이다.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은 아니고 다만 움직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내키게 하는 것이다. 고백은 모든 도덕적 죄에 대해서 심지어는 가장 비밀에 속한 것이나 그 뜻한 것 까지도 고백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은 죄는 사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검토 끝에 마음에 일어나지 아니한 것들은 회개 안에 포함된다. 회개는 일 년에 최소한도 한번은 해야 한다.

사죄(赦罪)는 열쇠의 성직자들이 준다. 내가 사하노라고 그들이 말하면 죄는 사해진다. 사죄는 판결을 언도하는 재판관의 행동과 같다. 주교는 더한 중죄를 사하고, 교황은 보다 더한 중한 죄를 사한다. 속죄는 범죄의 중한 정도에 따라서 성직자의 재량에 의해서 만족할 만한 징계로 이루어진다. 영원한 징계가 사해지면 일시적 징계도 사해진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면죄(免罪)의 특권을 넘기셨다. 그래서 이 특권은 가장 유효적절하게 써야 한다.

(5) 칭의(稱義, Justification)에 대하여

아담의 아들로 태어난 인간의 상태에서의 변화는 중생과 신앙의 또는 영세의 씻음 없이는 둘째 아담이신 구주를 거친 은총의 상태로 변화할 수 없다.

칭의(의롭다함을 입는 것)의 둘째 번 시작은 부르심이라 일컫는 앞서는 은총에서부터 사람이 스스로 돌아섬으로써 협력하는데서 시작한다. 이 성품은 사람이 이러한 것들을 밝히 드러난 참된 것으로 믿고 또 이에 대하여 그가 자유롭게 행동하면 신앙으로 말미암아 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시고 자비롭게 여기신 것을 믿으면 소망으로 말미암아 또 그런 까닭에 그가 이웃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죄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인애로 말미암아 생긴다.

그다음에 따라오는 칭의(Justification)는 죄의 사함뿐만 아니라 깨끗해짐과 속사람의 혁신이다. 그때 그들은 의롭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를 받아들여 그냥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공로를 받기 때문에 신앙과 소망과 인애로 말미암아 의가 끼어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 구원의 시작이요, 의(義)의 기초요, 뿌리이며,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선 어떠한 것도 신앙이건 사업이건 간에 칭의(稱義)의 은총에 합당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것은 은총으로(값없이, Gratis) 의롭게 된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칭의는 앞서는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일로 의롭게 되고 신앙으로는 그렇게까지 의롭게 되지 않는다. 의인은 혹 가볍고 용서받을만한 죄를 범하나 그런데도 의롭다. 그러므로 의인은 실수하지 않도록 기도와 예물과 구제와 음식으로 말미암아 계속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영광의 소망가운데 다시 태어나며 영광으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의인은 혹 칭의(稱義)의 은총으로부터 넘어진다 할지라도 고해성사로 다시 의롭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이 상실될 때가 있다. 종교에서 떠난 불신으로 말미암을 때이다. 의인의 일은 공로가 된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거쳐서 하는 일에 의해서 영생을 보상으로 받는다. 자유의지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아담의 죄 이후에 근절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동의함으로서 협력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는 생명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저들은 그들이 예정된 인원가운데에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모른다면서 예정론을 내세운다. 그리고 특별한 계시로 말미암은 것 외에는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 얻을 사람을 당신 자신에게 오도록 뽑으신다는 것이다.

(6) 연옥(煉獄, Purgatory)에 대하여

일시적인 징계에 의하여 사람이 깨끗하게 되는 모든 죄인은 칭의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기 전에 깨끗해지기 위하여 모두 연옥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붙들린 자의 영혼들은 신실한 자의 명복을 비는 기도에 의해서, 특수적으로 미사의 희생에 의해서 도움을 받는다. 이것은 열심히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연옥에서 당하는 고통이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다 조작된 것이요, 자체에 있어서 공상적이다.

(7) 일곱 가지 성사에 대하여

여기에는 영세, 견진, 성체, 고해, 종부, 신품 및 혼배의 일곱 성사가 있다. 그 외에 더도 없고 덜도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위엄이 더 크다. 고대 율법에도 같은 수효의 성사(聖事)가 있었다. 영세와 견진과 성체와 고해에 대해서는 위에서 다룬바와 같다.

종부(終傅) 성사에 대하여,

이것은 야고보 5:14-15에 근거한다. 죽기 전 병자에게 시행토록 되어 있다. 여기서 이것을 고별성사라고도 일컫는다. 이것은 주교가 축복한 기름을 바르고 아래의 말로 시행된다. 눈과 코와 접촉의 실수를 거쳐서 네가 무슨 죄를 지었든지 하나님께서 너의 죄를 사해 주시리라.

신품성사에 대하여,

사제(司祭)의 성직 가운데 일곱 신품이 있다. 위엄이 각기 다르나 이 모두를 교회제도(The Ecclesiastical Hierachy)라 일컫는다. 이것은 일종의 진영(陣營)의 터 잡이와도 같다. 성직자의 서품식(敍品式)은 기름부음과 그들에게 성령을 옮겨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주교나 사제의 서품식에는 특별한 능력이나 동의 또는 장관의 부름이나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만의 부름에 의하여 지명되어 성직에 오른 사람들은 성직자가 아니요,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한 도적이요, 강도라는 것이다.

혼배에 대하여

친등(親等) 배제(配劑)와 이혼은 교회에 속한다. 성직자는 결혼할 수 없다. 성직자는 모두 순결의 선물을 가져야 한다. 만일 서약을 하고도 지킬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파문(破門)을 받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당하게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거부하시지 아니하며 또 어떠한 사람도 그가 견딜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시유를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처녀와 독신상태는 결혼한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밖에도.

(8) 성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함께 다스리는 성도들은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 그리스도는 경배를 받아야 하고 성도들은 청원(請願)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도에게 청원하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한 분 중보자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성도에게 드리는 예배라 일컫는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배고 다니는 마리아와 성도의 영상(影像)은 존경과 영광을 드려야 한다. 그것들 안에 신성 또는 덕이 있는 것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드린 명예가 그들이 표현하는 본보기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입 맞추는 영상을 거쳐서 그리고 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므로써 그들은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성도들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성도들을 거쳐서 이루시는 것이다.

(9) 권능에 대하여

로마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머리요, 온 세계의 주교이다. 그는 종교회의 이상이요, 그는 천국을 열고 닫는 열쇠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죄를 사하고 씌우는 능력을 가진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는 동시에 이 세상과 천국 온 나라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또 주교나 성직자도 그로부터 이와 같은 능력을 가진다. 이 능력은 그 나머지 신도들에게도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열쇠를 가진 교직자라 일컫는다. 성경의 참 뜻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교회에 속한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법에 정한 응분의 징계를 받아야 한다. 평신도에게 성경을 읽히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 뜻은 교회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교직자들은 성경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교환해야 한다.

(10) 이상은 종교회의와 교황의 교서와 특히 트렌트(Trent) 종교회의에서 나온 것이요, 이것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는 그 안에 있는 것에 반대하여 생각하고 믿고 행동하는 사람은 다 파문으로 말미암은 저주를 받도록 규제하고 있다.

[개혁교회(改革敎會)와 그 종교 교리의 요약]

영적(靈的) 의의(意義)로 계시록에는 개혁 교회도 많이 다루어져 있기 때문에 설명을 드리기 전에 그 교리적 신조 역시 알려드려야 할 줄 안다. 아래와 같이 다루겠다.

(1) 하나님에게 대하여 (2) 주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3) 신앙으로 말미암은 칭의와 선한 사업에 대하여 (4) 율법과 복음에 대하여 (5) 원죄에 대하여 (6) 세례에 대하여 (7) 성찬에 대하여 (8) 자유의지에 대하여 그리고 (9) 교회에 대하여

(1) 하나님에게 대하여

그들은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그대로 믿는다. 이 신조는 각자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인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창조주요 보존자로서의 아버지 하나님과 구주요 속죄자로서의 아들이신 하나님과 밝은 빛을 보여 주시고 거룩하신 분으로서의 성신(성령)을 믿는 것은 다 잘 아는 일이다.

(2) 주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모든 개신교도들은 똑 같은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루터교도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처녀 마리아는 참 사람이요, 또한 참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았다. 이 까닭에 그녀를 하나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고 사실도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과 인성의 두 속성이 있다. 신성은 영원부터 있는 것이요, 인성은 시간 안에 있다. 이 두 속성은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두 그리스도가 아니요, 한 분이시며 똑같은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의 아들이신 양상으로 전적으로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그러한 분이다. 이것은 두 속성이 하나의 실체로 전적으로 혼합된 것도 아니요,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한 것도 아니요, 두 속성이 본질적 속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하나이다. 그 특질에 대해서도 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결합론은 신인합일설(神人合一說)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과 육체와 같은 가장 완벽한 합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요, 사람은 하나님이시라 함이 올바른 말이다. 그는 단순한 사람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수고하지 아니하고 위와 같은 사람으로 수고하신다. 그 인성의 본질은 아주 엄격하고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로 교통하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한 인격이 될 정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위하여 참으로 수고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수고였다.

인성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뜻하는 인자(人子)는 하나님으로 들어가실 때 실제로 하나님 우편에 오르셨다. 이 일은 그가 어머니의 모태에 성령으로 잉태되자마자 일어났었다. 그리스도는 그 인격적 결합으로 인하여 늘 그 위엄을 갖으셨다. 그러나 빈 상태(in the state of exinanition)에서는 당신에게 좋다고 보는 한에서만 위엄을 보이셨고, 부활 후에는 종의 탈(形體)을 충분히 그리고 전적으로 벗으시고 인성 또는 본질로 하여금 신적 위엄을 전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태로 들어가셨다. 그는 이렇게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다. 이것은 그리스도는 나눌 수 없는 한 분 인격으로 계시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 계시며 영원히 남으신다.

그리고 이 참되고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은 그 인성에 있어서까지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그는 천상천하(天上天下)의 만물을 다스리시고 또 모든 것을 채우시고, 우리와 함께 더불어 계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고 역사하신다. 받드는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보이는 본질을 거쳐서 보이지 않는 신성을 받들기 때문이다. 신적 본질은 유무상통하며 탁월한 점을 인성에게 나누어 주며, 기관을 거치듯 몸을 거쳐서 그 신적 계획을 시행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바울이 말한 대로 "신성의 모든 충만한 것이 육체로 거하신 것이다."(골로새서 2:9)

주님은 아버지를 우리에게 화해(和解)시키고, 또 이 세상 모든 죄를 위하여 원죄까지도 실제적인 것과 같은 비중으로 희생이 되기 위하여 화신(化身)을 성취하셨다. 그는 성령의 실체로부터 몸을 입고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처녀 마리아에게서 받으셨다. 말씀이신 당신은 그 인성을 옷 입으시고, 당신 자신에게 결합시켰던 것이다. 당신은 당신을 믿는 사람과 그들을 다스리고, 위로하고, 생명 있게 하기위하여 그리고 악마의 죄의 권능을 막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보냄을 입은 성령으로 믿는 사람들을 성별하신다. 그리스도는 이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려오셔서 모든 믿는 자를 위하여 지옥을 부수셨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을 완수 하셨는가? 당신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검토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다음 세대를 위하여 이 지식이 보존되길 원하신다. 그때는 신비뿐만 아니라 그밖의 다른 것도 밝히실 것이다.

이 하나하나는 루터와 어거스틴 신앙 고백과 니케야 회의 및 스말칼틱신조(The Smalcaltic Articles)에서 나온 것이다. (統一信條, The Formula Concordiae)를 보시라.

통일신조 안에서 다루어 있는 또 다른 개신교도는 이렇게 믿는다.

그리스도는 그의 인간성에 따르는 과격성 때문에 창조된 선물과 유한한 능력만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육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보통 사람과 하나도 다름이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인성으로 말하면 그는 무소부재하지 않고, 무소부지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것이 없지만 그는 왕으로서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을 다스리고,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으로서는 성부와 더불어 계시며, 시간 안에 나신 사람으로서는 천국의 천사들과 더불어 계신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시며 인신(人神) 이라 말하는 것이나 그밖의 이와 비슷한 말은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기독교계의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맞춘다. 거기 이러한 말들이 나온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참 신앙은 이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 이 세상 이전에 계신 아버지의 실체로서는 하나님이시오, 이 세상에 태어난 어머니의 실체로서는 사람이시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완전한 사람이시다. 곧 당신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면서도 두 분이 아니요, 한 분 그리스도시다. 신적 본질이 몸으로 전환한 한 분이 아니요, 그의 인성을 하나님으로 취하신 한 분이시다. 실체를 혼합시켜서가 아니라 통일된 인격에 의해서 전적으로 한 분이시다. 왜냐하면, 합리적 영혼과 육체가 한 사람이듯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당신은 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3) 신앙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선한 사업에 대하여

성직자의 의롭게 되고 구원 얻은 신앙은 이렇다. 아버지 하나님은 인류의 죄악으로 인하여 스스로 그들을 돌보지 않게 되셨다. 따라서 죄(Justice)로 그들을 영원한 죽음으로 저주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속(贖)하고 되찾기 위하여 그리고 배상하고 화해하기 위하여 세상에 아들을 보내셨다. 그리고 아들은 율법의 저주를 몸소 지시므로 말미암아, 또 친히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통을 받으시므로 말미암아 이 일을 완수하셨고 따라서 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들은 하나님의 의를 전적으로 충족시켰고 스스로 피가 되기까지 하셨다.

또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의 공로를 믿는 사람에게 이것을 돌려 그들의 것이 되게 하고,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인정과 선한 사업과 회개를 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새롭게 하시고 또 성별하셨다. 그러나 이 신앙은 구원의 유일한 수단이요, 사람의 죄는 이것으로만 사해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행동과 심정 상태를 구분한다. 칭의의 행동이란 칭의의 시작을 뜻한다.

칭의의 시작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자신 있게 간직할 때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칭의의 심정 상태는 그 신앙의 발전과정을 뜻한다. 신앙의 발전과정은 성령의 내적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이것은 어떠한 표시로 말미암지 않고는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을 여러 가지로 가르친다. 그들은 또 알기 쉬운 선한 사업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 사업은 사람과 그의 의지로 행해지며 그 신앙의 결과로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선한 사업을 의롭다고는 하지 않는다. 이기적이면서도 인간의 공로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란다.

이것이 현대 신앙의 요약이다. 그러나 이것을 굳히는 것과 이에 대한 전통은 많고 구구하다. 여기서 몇 가지만 인용할까 한다.

사람은 그 자신의 힘이나 공로나 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게 된단다. 그들은 그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은총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들의 죄는 그분으로 인하여 용서를 받는다고 믿는다. 그는 죽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는 이것을 당신 앞에 의를 믿는 자들에게 돌리신다(轉嫁, 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받으시고 돌아가셨다는 이 신앙은 역사적 지식일 뿐만 아니라, 죄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값없이 사해졌다는 것을 진심으로 긍정하고 확신하고 믿는 것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세 가지 것이 일어난다. 값없는 약속, 대가로서의 그리스도의 공로, 그리고 화해가 이것이다.

신앙은 그것으로 우리가 그 약속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평가를 받는 공의(公義)이요, 의롭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은 것을 뜻하며, 이것은 또 우리가 씩씩해지고 거듭나게 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또 신앙이 우리로 의롭다고 간주하는 것은 그것은 선한 사업이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그의 순종과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과 부활이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할 수 있는 어떠한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신앙 이외에 아무것도 없으며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의의 행위 가운데 있는 신앙은 말씀과 청각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요, 성령의 역사이다. 그때 사람은 소금 기둥이나 목석이 스스로 움직이지 아니하고 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조금도 협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한 후에는 사람도 협력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서는 그 자신도 어떠한 것도 더불어 역사하지 않고 자연적이며, 시민적이며, 도덕적인 일에 있어서만 인간 의지가 역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선한 것을 뜻하고, 그러는 가운데 기쁨을 맛보는 데는 영적인 것에까지 나아갈 수 있으나, 그런데도 이것은 그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성령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돌아섬(歸依, 귀의) 안에서 그들 안에서 시작된 새 능력과 선물로 말미암아 협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참된 돌아섬 안에서는 변화와 새로움과 적극성이 인간의 이해성과 심혼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인애와 선한 사업과 회개는 의의 행위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의(義)의 심정 상태 안에서는 이것들이 필요하고 특히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인애와 선한 사업과 회개)에 의하여 사람들은 이 세상 육의 보상을 받을만하나 죄를 용서 받는다거나 영생의 영광을 받지는 못한다.

까닭은 믿음만이 율법의 행위 없이 의롭게 하고, 구원 얻게 하기 때문이란다. 행동 안에 있는 신앙은 사람을 의롭게 하나, 심정 상태 안에 있는 신앙은 그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새롭게 되는 데는 계명에 명령한 대로의 선한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 시민법에 따라서 정욕이 제재를 받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하나님은 교리와 율법의 행정관과 법칙을 마련하였던 것이요, 그러므로 선한 사업으로 우리가 죄를 씻고 구원 얻는다는 것이나 또 선한 사업이 신앙을 보존하는 어떠한 효과를 가진다는 것도 잘못이며, 또 사람이 그의 공정한 이성으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이성이 그 자신의 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란다. 신앙과 구원은 선한 사업으로 보존되거나 남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으로만 그리고 신앙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선한 사업은 성령이 나타나고 그들 안에 거하는 증거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선한 사업이 구원 얻는 데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을 치명적인 말이라고 싫어한다. 왜냐하면, 좋다는 것은 성령의 내적 사업으로 생각되나, 인간 고유의 의지에서 나온 외적 사업으로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로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최후 심판 때 선하고 악한 사업이 과연 인간의 신앙을 적절하게 하였는지 아니 하였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것이라고 한다.

이 신앙은 오늘날 전 개신교계의 교직자 가운데 성행하고 있으나 평신도들에게는 소수를 제하고 그렇게 성행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평신도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과 성령을 믿고 착하게 살고 착하게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고 믿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을 구주로 모신다. 평신도들은 설교자의 말하는 칭의의 신비를 모르기 때문이요, 그들은 또 설교자들이 이 신비를 가르친다 할지라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는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생들은 실제로 그들이 그것을 알고 학교에서, 대학에서 그것을 얻노라 많은 노력을 하였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 자부한다. 그래서 이것을 위해서 성직자의 신앙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선생들은 이 똑같은 신앙을 그 안에서 개신교회가 세워진 나라마다 다다르게 가르친다. 독일과 스웨덴과 덴마크에서는 성령이 그 신앙으로 말미암아 역사하고, 인간을 의롭게 하고, 성별한다고 가르치고, 다음에는 계속해서 율법의 일 없이 그들을 새롭게 하고 거듭나게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믿고 확신하는 가운데 그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더불어 은총 안에 있고, 그들이 행한 악이 실제로 드러나도 연속 사(赦)함을 입는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사람이 이것을 몰라도 이 신앙의 인정을 낸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사람이 자체 안에서 내적으로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느끼면 이 역사 역시 인정의 선이라 가르치고, 만일 이것을 느끼지 아니할지라도 구원을 얻기 위하여 선을 행하면 그것을 선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 신앙은 사람에게서 나온 어떠한 것일 수 있는 공로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신앙이 임종 시에도 이와 같이 역할을 하나 어떻게 되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시고 그 믿음만의 신앙을 거쳐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나 인간 의지에 이르러서는 당신은 그것을 만져보지도 않고 거기서 돌아 서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 의지를 가볍게나마 타진하신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인간 의지에 속한 악은 하나님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로서는 성직자의 이러한 신비를 다소라도 아는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책자로 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평신도들을 그것을 별미로 즐기지 않을 것을 그들은 잘 알기 때문이다.

(4) 율법과 복음서에 대하여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다. 무엇이 죄인가를 알고 위협과 공포에 의하여 나중에는 은총을 약속하고 널리 알려서 금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특별한 임무를 원죄와 그 모든 열매를 보여주고,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무서운 정도로 타락하였으며, 얼마나 깊이 몰락하였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단에 의해서 율법은 사람을 떨게 하고, 겸손하게하며, 넘어지게 하여 그로 하여금 자포자기케 하며, 불안 가운데 도움을 청하게 한다. 율법의 이 결과는 회한(悔恨)이라 일컫는다. 이것은 적극적 또는 인위적인 것이 못되고 소극적인 양심의 가책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와 신앙에 관한 전 교리이다. 따라서 죄 사함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견책하는 것도 협박하는 것도 아닌 오직 위로를 주는 가장 기쁜 사자(使者)이다. 율법으로는 모든 불 경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나고, 사람이 저주를 받으며, 이에 따라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복음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스도와 복음은 다 가르쳐야 한다.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율법의 저주를 지시고 모든 죄를 대속하신 것과 우리는 그 때문에 신앙에 의한 죄 사함을 얻은 것을 가르친다.

성령은 주어진 것이요, 받은 것이며, 인간의 마음은 율법에 속한 설교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복음에 속한 설교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이다. 성령은 후에 율법의 성직을 이용하여 십계명 안에 있는 무엇이 선한 뜻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좋아하시는 것인가를, 따라서 성령이 죽게도 하고 살게도 하는 것을 가르치고 보여 준다는 것이다.

율법의 일과 성령의 일은 구분해야 한다. 믿는 자는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총아래 있는 것이 그 주된 이유이다. 율법의 의는 의롭게 하지 않는다. 곧 화해도 거듭나게도 않는다. 스스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받게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이 주어지면 율법의 응함이 뒤따른다. 십계명의 둘째 판(Table)의 일들은 의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인간과 더불어 행동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마땅히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롭게 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행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죄 없이 죄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율법이 믿는 자를 저주하지 않도록 율법의 권리를 제거하셨다. 왜냐하면, 당신은 인간을 위한 회해가 되시며 그것으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입기 때문이다.

(5) 회개(悔改)와 고백(告白)에 대하여

회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회한(悔恨) 또는 죄로 인하여 양심에 가책을 갖는 공포요, 하나는 복음에서 나오고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양심을 위로하고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가 전적으로 죄인이라고 자백하는 사람은 모든 죄를 알고 하나도 빠지지 않고 하나도 잊지 않는 사람이다. 이러므로 죄는 씻어지고, 사람은 깨끗해지고, 수정되고 성별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죄로 하여금 지배하도록 두지 아니하고 죄를 누르고 금하기 때문이다. 죄를 헤아리는 것은 그 사람이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자유이다. 큰 맹점(盲點)은 사사로이 고백하고 사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혹 어떠한 사람이 원하면 그는 그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자로 부터 사죄를 받으면 죄는 그때 사해진다. 이런 경우 성직자가 쓰는 말은 이렇다.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보사, 그의 신앙을 굳게 하소서. 그의 믿는 대로 되게 하소서. 주의 분부대로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너의 죄 사함을 너에게 선언하노라."

그러나 그런데도 죄는 행위로 사해지지 않음과 같이 회개로 사해지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사해진다. 그러므로 성직자의 회개는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뿐이요, 그들이 신앙 안에서 견딜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루어진다. 사죄(赦罪)나 속죄는 필요치 않다. 그리스도께서 사죄가 되시고 속죄(贖罪)가 되시기 때문이다.

(6) 원죄(原罪)에 대하여

그들은 가르친다. 아담의 타락 후에 모든 인간은 죄를 지닌 본성대로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정욕을 가진 채 번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와 성령으로 다시나지 아니한 사람을 저주하고 그들 위에 영원한 죽음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 공정의 결핍이요, 동시에 영혼면의 무법적 경향이요, 썩은 습성이다. 그렇게 사람이 지음을 입었고 타락 후에도 그렇게 하나님의 피조물에 남아있는 인간성 자체와 원죄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썩은 인간성과 그 인간성을 타고 나오고 인간성이 썩어버린 썩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 외에 어떠한 사람도 인간성 자체에서 인간성의 썩은 것을 떼어낼 수 없다. 썩은 인간성을 떼어내는 것은 축복받을 부활이 있을 때 분명하게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성 자체 곧 인간이 이 세상 두루 가지고 다니는 인간성은 원죄 없이 다시 일어나 영복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하나님의 일과 악마의 일과도 같다. 이 죄는 마치 사탄이 어떠한 악을 실체적으로 만들어 인간성과 더불어 뒤섞게 한 식으로는 인간성 속으로 침범해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속에 근본적으로 지음을 입은 의가 상실된다. 그래서 원죄는 하나의 우발적 사건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이 거기서 나온 씨 자체는 그 죄로 물들어 있다. 이 때문에 사람은 그 부모에게서 악화된 경향성과 마음의 내적 부정을 물려받는 것이다.

(7) 세례에 대하여

세례는 단순한 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취해진 물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봉(印封)하고 성별된 물이다. 세례의 덕과 일과 열매의 목적은 사람이 구원을 얻고 기독교인과 사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세례로 말미암아 사망과 악마를 이기는 승리가 주어지고, 죄 사함과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일과 성령과 그의 모든 선물과 모든 사람과 믿은 각 개인에 대한 영원한 축복이 주어진다. 세례로 말미암아 유아에게도 신앙이 주어지는가는 의심 점을 던지며 애써 알아보기에는 너무 심오하다.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옛 사람에게 대해서는 고행이요, 새 사람에게 대해서는 부활이다. 그래서 이것을 중생의 세수 대야라 말할 수 있다. 또 말씀 안에 있는 참된 세수 대야이요, 그리스도의 죽음과 매장 안에서의 씻음이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이 같은 일로 일단 시작한 나날의 세례이다. 물이 이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요, 물속에 있는 물과 더불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물에 부가된 하나님의 말씀의 신앙이 이것을 이룬다. 이 까닭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실제는 사람이 수행하나 그들로부터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이 분명하다. 세례는 악하게 된 정욕을 없애는 것으로 말미암아 원죄를 제거하지 아니하고 이에 대한 범죄만을 제거한다.

그러나 개신교의 다른 사람은 믿는다. 세례는 물로 겉을 씻는 것이요, 그것으로 내적으로 죄를 씻는 것을 뜻한다고, 세례는 중생과 신앙과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주지 않고, 다만 그것들을 뜻하고 인(印)칠 뿐이다. 이러한 것들은 세례 안에서 또는 더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자란 후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택함을 입은 사람만은 그리스도의 은총과 신앙의 선물을 얻는다. 구원은 세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정규의 교역자가 없는 곳에서는 그밖의 사람들이 베푸는 것도 허용되어 있다.

(8) 주의 성찬(聖餐)에 대하여

루터 파 교도의 개신교회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성찬 또는 제단의 성례 시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진실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나타나며, 떡과 술과 더불어 실제적으로 나눠지고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참된 피가 떡과 술 안에, 더불어 그리고 아래 있으며, 먹고 마시는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한 떡과 술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내포되어 있고 그리고 거기에 매여 있는 것들이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 떡과 술에 부가(附加)되면 그것이 성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카토릭 교도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화체(化體, 아주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버린 것)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혼의 양식이요, 새 사람을 먹이고 힘차게 하는 것이다. 이 성례를 지키게 한 것은 신앙이 고쳐지고, 그 능력을 되찾고,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공로 있게 하신 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신앙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취해질 뿐만 아니라, 그 떡과 술의 성례의 결합 때문에 초자연적으로 입으로도 취하는 것이다. 값있는 성찬은 순종 안에만 있고, 참된 신앙으로 산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만 있다. 요점은 주의 성찬과 세례의 성례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의지와 은총의 증거물이다. 성찬의 성례는 신앙을 거친 죄 사함의 약속이요, 마음을 감동시켜 믿게 하며 말씀과 성례를 거쳐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성직자의 봉헌이 이것을 내지 아니하고 주의 무소불능의 덕에만 돌려야할 것이다. 주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계실 때와 같이 합당한 사람이나 합당치 않은 사람이나 그리스도의 참 몸과 다 같이 피를 받는다. 그러나 합당한 사람은 구원으로, 합당치 않은 사람은 멸망으로 간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합당한 사람이다. 어떠한 사람도 강제로 성찬에 참여 시킬 수 없다. 하지만 영적 기갈이 박력을 가하면 누구나 참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가르친다.

성찬식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영적으로만 취한다. 떡과 술은 표시요, 모형이요, 상징물이요, 기호요, 형상이요, 유사 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몸으로는 나타나시지 않는다. 당신의 신적 본질에서 나온 덕과 역사안에서만 나타나신다. 천국에서는 개별적 교통에 따라서 결합이 생긴다. 값있는 성찬은 신앙에만 의존할 뿐만 아니라 그의 준비하는데 에도 의존한다. 값있는 사람만이 그 덕을 받고, 값없는 사람은 떡과 술만 받는다. 이러한 의견 차이는 있어도 모든 개신교도들은 이 점에 일치한다. 성찬을 값있게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회개의 일을 하여야 한다고 루터 파 교도들은 주장한다. 만일 그들이 악한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성찬에 참여하면 그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고, 영국 사람들은 그렇지 아니하면 악마가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듯 그들 속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례에 들어가기 전에 읽는 기도서로 분명하다.

(9) 자유의지에 대하여

타락(墮落) 이전과 타락 이후의 상태 곧 신앙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된 상태와 부활 후의 상태를 구분한다. 인간은 타락 이래 영적이며 신적 사물에 있어서 어떠한 것을 그 자신의 능력으로 시작하거나, 생각하거나, 믿거나, 이해하거나, 뜻하거나, 협력 또는 함께 힘을 모으거나, 또 그 자신을 은총에 맞게 또는 부합시키는 일을 전적으로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연적 의지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를 불쾌하게 하는 것을 위해서만 있다. 이 까닭에 사람은 영적인 것에 있어서 목석과 같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가 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적극적인 것은 아니나 소극적 능력을 가진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타락 이래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아니 듣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까닭에 신앙의 불꽃이 마음속에서 점화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로 인한 죄 사함을 껴안으며 위안을 나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시민적 정의를 행하고 또 이성의 범위 안에 있는 바와 같은 이러한 것을 선택할 자유를 즐긴다.

(10) 교회에 대하여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요, 교제이다. 교회는 그들이 구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같은 그리스도와 같은 성령과 같은 성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간에 세상 널리 펼치어 있다. 교회는 원칙적으로 신앙사회이다. 이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몸이다. 선한 사람은 사실에 있어서나 이름에 있어서나 교회이나, 악한 사람은 이름만 교회이다. 악인과 위선자는 파문당하지 않고 있으면,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의 일원이나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은 아니다. 교회 의식 또는 예배 형식은 자연적인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아니요 그 일부분도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유롭게 세우고, 변경하고, 폐기하기도 한다. 보기를 들면 예복과 시간과 날짜와 식량과 그밖의 것이 다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저 교회를 이러한 자연적인 것으로 저주해서는 안 된다.

이상이 개신교회와 종교의 교리적 신조의 요약이다. 그러나 슈잉펠드파 교도, 페라지아파 교도, 마니키아파 교도, 도나트파 교도, 재침례파 교도, 알미니아파 교도, 요즈음에 와서는 퀘이커파 교도 및 모라비아파 교도들이 가르치는 것은 상고(相考)하지 않는다. 개신 교회가 그것들을 이단이라 거부하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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